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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지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자례('작렬'의 중국식 발음)라는 동네는 말 그대로 촌구석이다.
동네 사람이 이웃이자 친척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
그곳에 황당한 일로 감옥에 다녀온 쿵씨 아버지가 네 아들과 살고 있다.
출옥한 후 그는 아들 넷을 앉혀놓고 지금부터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마주친 그것을 갖고 돌아오라 명한다.
그것이 너희의 인생을 좌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덧붙이며.
쿵씨 아버지는 아들 넷을 내보낸 것도 모자라
친히 동네 사람들 꿈을 찾아다니며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걸어가 처음 마주치는 그것을 찾으라 하시니,
이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계시처럼 운명의 무언가를 만난 아들과 동네 사람들.
큰 아들은 선생님, 둘째는 정치가, 셋째는 군인, 넷째는 선량한 학생이 되며
자례는 "작렬(炸裂)"이라는 뜻 그대로 폭발해서 터지기 위해 꿈틀대기 시작한다.
쿵씨의 둘째 아들은 작은 동네 자례를 리 -> 읍,면 -> 군 -> 시 -> 광역시 (편의상 우리 행정구역으로 바꿨음)로 성장시키기 위해 온갖 불법도 마다하지 않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달리는 기차에서 석탄을 훔쳐 파는 것을 시작으로
선거에 이기기 위해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선물을 뿌리는 것은 물론
정략결혼도 불사하고, 가정도 내팽개친다.
자례를 비롯해 그를 둘러싼 세상은 그가 내미는 돈, 여자, 술, 선물을 당연히 받고
그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역으로 제공하기도 하는데
653쪽에 달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그러하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기보다 당연한 절차라고 여겨진다.
독자인 나도 이러한데 자례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형의 권력으로 요직에 앉은 막내가 자동차 없이 걸어서 출퇴근하는 모습은 온 동네의 구경거리가 될 지경이고
청탁을 위한 선물을 거부하자 정신병원 진료까지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진다.
온갖 부정과 부패를 바탕으로 쑥쑥 자라는 자례.
한 인간의 야망은 지역의 역사를 바꾸고
다른 인간의 야망에 의해 무너진다.
중국 소설답게(?) 황당.
눈빛 하나로 꽃이 피고 지는 신화적 요소에
엉성한 인과관계는 전래동화같고
그래서 얕잡아보려면 가슴 철렁한 풍자가 등장하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저자의 이야기를 보면 현실은 소설보다 더 황당하다고 하니
너무 극단적인 에피소드 아니냐는 판단은 보류하시길.
내가 좋아하는 B급 정서 풍자 소설.
"아큐정전"이 한 인간을 통해 중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면
"작렬지" 는 한 동네를 통해 중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작이라 하겠다.
단, 유치찬란, 황당무계를 기본으로 하니 진중함을 기대하면 절대 안 됨.
(사람들이 뱉은 침에 파묻혀 목숨을 잃는 설정이 가능하냐 말이다. ^^;;)
성실하고 열심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할 땐 인정받지 못하던 셋째 아들이
돈으로 명예를 얻은 후 세상을 돈 중심으로 보게 되는 과정이 가장 씁쓸했던, 작렬지.
오버랩되는 장면이 너무 많아 나중엔 생각하길 멈추고 글만 읽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