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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 8시부터 늦은 밤 10시까지 학교에 갇혀 있던 고등학생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거니와 그때만큼 답답했던 적도 없다. 아루 일과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는데도 감각만큼은 아주 예민하게 열려 있었나 보다. 세상에 빈틈은 너무나도 많아 보였고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또래 녀석들 가운데도 얍삽한 위선자로 보이는 이들이 널려 있었다. 세상은 진실보다는 허위에 가까웠고 더 나빠질 것도 없고 더 나아질 것도 없어 보여 너무나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흘러 지금은 감각이 너무나 무디어졌다. 허위임에도 허위라고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위선과 거짓의 덩어리라고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더 이상 감각이 펄떡거리며 예민하지 않은 나이여서일까. 《호밀밭의 파수꾼》 속 홀든 콜필드의 허위에 대한 끝없는 넋두리는 다소 짜증이 나기까지 한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이유 있는 반항을 하기가 더욱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인사에서도 허위를 들먹거리니 약간은 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십여 년을 대단한 작품이라고 추앙해온 저명한 평론가들과 탐독가들이 무식하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왠지 콜필드의 행동과 속마음이 불편하다. 허위를 꼬집혀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새로울 게 없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콜필드는 벌써 네 번이나 고등학교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지금 다니는 펜시 고등학교도 퇴학당할 처지다. 콜필드는 자신의 펜싱 방비들을 지하철에 두고 내린 날, 축구시합에 가지도 않고는 스펜서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가서 다 똑같은 선생의 충고를 듣는다. 그러고 나서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축구시합을 보러가서 한산한 기숙사에는 제멋대로인 옆방 녀석이 역시나 있다. 추접스럽고 덜 떨어진 녀석을 간신히 참아내지만 룸메이트와 다투고 흠씬 두들겨 맞은 뒤 별안간 짐을 싸들고 뉴욕 시내로 나온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다가, 문득 센트럴파크에 있는 작은 연못에 노니는 오리들은 겨울이 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택시기사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지만 기사는 자기를 놀리는 거냐고 되려 화를 낸다. 변태들이 득시글거리는 허름한 호텔을 숙소를 정하고 나서 술을 마시러 뉴욕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담배를 연신 피워댔다.
며칠 동안 이 도심에서 만나거나 본 인간들은 모두 얼간이들이고 허위로 가득찬 인간들이었다. 부모나 선생이나 어른들은 모두 거짓된 모습만 보이는 이중인격자들이다. 어른들은 그렇다. 하지만 피비는 다르다. 콜필드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믿는 피비는 거짓말도 할 줄 모르고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한다. 아이들은 그렇다. 꼼짝 못하게 만든다. 피비는 콜필드에게 위안이자 희망이다. 콜필드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밀밭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넘어지려 하면 얼른 잡아주는 일,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 넘어지려는 순수함을 지켜내는 일이 하고 싶은 것이다.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청소년의 심적 갈등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게 내 나이에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이냐. 내가 콜필드와 비슷한 또래도 아닐뿐더러, 자식이 있어서 그들의 속내를 다시 이해해보려 애써야 하는 나이도 아니거늘. 지금의 나는 허위로부터 벗어날 현실적인 방안이나 허위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또한 순수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순수함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려면 먼저 자연을 지켜야 한다.
민음사의 번역서들은 하나같이 엉터리다. 홈즈전집을 비롯한 여러 번역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번역투가 가시처럼 눈에 박힌다. 일차적인 책임이야 물론 번역자에게 있겠지만, 이를 묵과한 출판사에도 그 두번째의 책임이 크다. 우리나라의 첫째가는 출판사라는 곳에서 이렇게 책을 내면서, 게다가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좋은 책들은 다 이 모양으로 냈으리라 생각하니 참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