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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과 나는 다릅니다
‘은퇴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 외딴 지방으로 이사 온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 그들 앞에 <이웃>이라는 한 남자가 찾아온다. 매일 오후 네시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네>, <아니오> 대답밖에 하지 않으면서 두 시간을 버티는 이 남자 앞에서 노부부는 신경과민 상태에 빠지는데……’ - 표4글 가운데
이 소설은 표지글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여 사건은 줄곧 반복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현실과는 달리 에밀의 내면은 점점 혼란스러워집니다. 그저 그렇겠거니 여겼던 일은 뜻밖에도 중대한 사건이 되고 결국 뜻밖의 사실로 치닫게 됩니다. 시간에 따른 에밀의 심리 묘사는 집요하고도 정연합니다. 질려버릴 정도입니다.
이 소설 읽어보세요. 당신은 우리가 결코 같아질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같아질 수 없다는 게 비극이고 우리 사이의 한계라고 결론내리면 좀 곤란해집니다. 의도와는 벗어나게 되니까요.
이 책을 다 읽던 날, 심리학을 공부하는 친구의 권유로 심리 검사를 받았습니다. 대개가 그러하듯 질문을 받으면 그 대답이 결과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 대충 짐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도 모르는 혹은 규정하지 못한 나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색다른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말이 있지만, 잘 안다는 것이 정확하게 안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이야기 속 에밀은 어쩌면 정말 순진한 노인네일지 모릅니다. 황혼이 되기까지 줄곧 자신은 교양 있고 예의바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다른 자아가 고개를 내밀 때 미칠 듯이 혼란스러웠겠지요. 아니, 내 안이 나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정했어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겠군요.
나는 내 본질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환경에 길들여진 자아와 본능적인 자아 중 어느 것이 내 본질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를 모른다니 약간은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합니다. 그래서 심리 검사에 관심이 쏠리기도 하는 모양일 테지요. 그래서 이야기 속 화자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별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자아들이 뭉쳐진 나 역시 나입니다. 하나의 인격만 가진 이는 드물 겁니다. 서로 다른 인격들을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문제겠지요.
나라는 한 개체의 속도 이렇듯 복잡한데, 나와 당신은 오죽 복잡하고 다르겠습니까. 에밀과 쥘리에트가 아무리 유치원에 다닐 때 만나 노인이 될 때까지 같이 살았다지만 - 이 사실은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엄연히 다른 존재들이고 둘 사이에는 분명 존재의 벽이 가로놓여 있을 겁니다. 낮든지 높든지 간에.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이 벽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담의 높낮이나 둘 사이의 거리를 잘 조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필요하지요. 이 간극을 무시하면 오히려 더 큰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결국 파탄과 불신, 그리고 헤어짐이 있겠죠. 너무 멀리 있어서 애초부터 만날 수 없는 사이도 있겠죠. 그리고 만났어도 조율할 수 없어서 헤어질 수도 있겠죠. 이해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릴 줄 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달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어찌해야 하는지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자기합리화해야죠.
당신과 나 사이에 객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당신 아니면 나, 자기합리화 아니면 이해일 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