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

 

 

 

 

어제 권혁웅의 평론집 <미래파>(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표제 평론 '미래파'를 훑어보다가 인용된 시들 중 장석원의 '金秋子에게 보내는 戀書'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인상 그대로 '활달한' 시인데, 최근 들어 그런 걸 드물 게 보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구입했다. 작년 11월에 나온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가 그것이다. 시는 3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의 '구성감각'으로는 뒤에 네번째 단락이 더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그래서 2% 아쉬운 감을 갖게 되지만), 읽어볼 만한 시이다. '방법적 인용'의 새로운 차원을 건드리고 있는데, 권혁웅의 해설은 이를 '시와 다성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시를 전문 인용해본다(80년대를 말한다는 건 요즘 시로선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1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 그대의 눈동자에 고이는 슬픔 때문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 갈대의 순정 때문에 그날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빛좋은 개살구.

그대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여, 그대를 만지면 몸이 부풀어, 아흔 아홉 풍선이 되어 서쪽으로 날아가버려, 꽃잎이 피고 또 졌기 때문에, 꽃잎 속에 다시 꽃잎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날은 부처님이 오신 날이었어, 자비는 그들에게 구해야 돼, 살려줘, 날 구해줘, 날 묻지 마, 파헤쳐줘, 뒤에서 날 쑤셔줘

떨어지는 꽃잎, 삼천의 꽃잎들, 실려간 청춘, 푸른 청춘, 꽃다운 그대 얼굴 위에, 다시 꽃비 내리는 오월에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 왜 가버렸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내게 사랑을 실어보냈는가, 나는 토막난 몸통이고 끊어진 길인데

다만 후회하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길 위의 혈흔 더운 피 더러운 피, 나의 시신경에 와 닿는 오월의 햇빛, 희미한 전기 신호, 뭉개진 얼굴

그대는 물질적 증거이기 때문에, 짓이긴 꽃잎이기 때문에, 오월의 햇빛 속에서, 소리없이 지는 한 점 그림자, 물들자마자 한 겹 벗겨지는 껍질

그리고 나의 사랑스런 벌레들 이 풍진 세상을 만나 번성의 시대를 보냈으니, 변태해야 하리, 벌레들이여 또 다른 살덩어리여, 내 아파트로 와서 하룻밤 즐기시라

그대 또 다른 살덩어리여, 붉은 혀 붉은 젖가슴 붉은 엉덩이여, 어두운 거실 소파 위에 나의 게르니카, 그대 차가운 추상이여


2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의 이미지면 나는 완성된다. 환상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희망이 나를 발기시킨다. 나의 연인이여, 내 가슴에 볼 비비는 꽃잎이여, 머릿속의 총알이여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는, 그렇다. 그대에게만 해당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그대만이 독점한다.


3.

우리는 자욱한 歲月에 걸친 試鍊과 苦惱의 時代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成長과 成熟을 通해 自己 完成의 時代를 形成하여야 할 80年代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聖스러운 새 時代의 序場에서 大統領이란 莫重한 責務를 맡게 된 本人은 國家의 成長과 成熟이 本人에게 賦與된 歷史的 課題임을 痛感하고 있습니다.('제5공화국 대통령 취임연설문'에서)

 

 

06. 01. 11.

 

 

 

 

 

 

 

 

 

 

P.S.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의 <쇼쇼쇼: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나무, 2004)에는 '마음의 요람이 되어버린 김추자'란 절이 포함돼 있다.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4)에도 '양희은, 김추자, 심수봉'이란 글꼭지가 있다(이 책은 산 것 같은데 그 글은 아직 못 읽었다). 그리고 이선영의 시집 <일찍 늙으며 꽃꿈>(창비, 2003)에는 '이미자와 김추자'란 시가 들어 있다(이 또한 아직 못 읽었다). 이영미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황금가지, 2002)는 우리 대중음악사인데, '신중현과 김추자에 대한 기억들'이란 꼭지에서 김추자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김추자(1951-)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어렸을 적에 접했던 대중가요는 주로 남진, 나훈아, 아니면 패티김과 이미자였다(아마도 어머니의 취향이셨던 듯하다). 물론 이 '전설적인 가수(혹은 '간첩')의 노래를 들어는 보았겠지만, 그다지 조숙하지 않았던 '나의 취향'은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됐기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점령했던 건 마이클 잭슨이었고 컬처클럽이나 듀란듀란 같은 '팝'그룹들이었다. 그 음악취향이라는 것도 '조지 마이클'과 '마돈나'를 거쳐 'R.E.M.' 정도에서 저문 듯하다. 이후로는 대중음반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영화음악이나 편곡된 국악 정도를 가끔 듣는다.

 

 

 

 

 

 

 

그런 가운데 없는 인연을 만들어낸 건 조관우의 리메이크 '님은 먼 곳에'이다. 한 연구소에서 간사로 근무할 때에는 벅스뮤직에서 온갖 버전의 '님은 먼곳에'를 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서 종일 듣곤 했다('빗속의 여인'도 그런 식으로 듣곤 했다). '꽃잎'은 그 다음이었다. 몇달 전인가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룬 한 TV프로그램에서 김추자 특집이 다루어지는 걸 보았고 김추자에 대한 새삼스런 '흥미'를 느꼈지만 내가 터치할 수 있는 쪽은 아니어서 흥미로운 책들이 씌어지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가 기대를 얼마간 충족시켜준 것. 

 

시인은 김추자의 '꽃잎'을 주조음으로 깔면서 마치 디스크 자키처럼 여러 장르의 여러 노래들을 뒤섞고 있는데, 좀 아쉽게 생각하는 건 '나와 김추자'의 구체적 세목이 빠진 것. 해서 시는 재미있지만 감동은 없다. 물론 3번째 단락에 전두환의 연설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시인이 의도한 건 돌발적인 충돌의 몽타주와 그로 인한 충격효과인 듯하지만, 시적 화자의 포지션은 (황지우식의) 방법적 인용과 (유하식의) 개인사적 고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돼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뒷심'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참고로 신중현 작사/작곡의 '꽃잎' 가사를 옮겨둔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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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내 마음의 망명지

 

 

 

 

제목은 문학비평가 유종호 선생(1935- )의 최근 산문집에서 가져왔다. <내 마음의 망명지>(문학동네, 2004).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의 산문집을 한때 즐겨 읽었던 듯하다.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낀다. 일간지 지면에 실린 칼럼 등을 모은 이런 책들은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가장 적합한데(1부에 실린 글 여러 편을 나는 한 일간지에서 이미 읽었었다), 길지 않은 글들에 박혀 있는 적절한 사유들을 해바라기씨 파내먹듯이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맛은 좋지만 칼로리는 낮은 책, 그래서 군것질로는 아주 유익한. 

해서 현재로선 책을 2/3쯤 읽었는데, 이미 연이어 읽을 책들의 목록도 정해두었다. 역시나 '문체의 옹호'란 글에서 저자가 은근히 추천하고 있는 책들이다. 정명환 선생의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2003)와 곽광수 선생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작가, 2002)가 그것들이다. 나는 거기에 이 참에 읽어볼 요량으로 이미 갖고 있는 책 두 권,  유종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와 정명환,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03)를 더 얹었다. 이 가을이 뒤늦게 풍족해진다.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나는 유종호 선생의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더러 꼼꼼하게 공들여 읽지는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들이 낯설지 않은 것. 가령,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이번 산문집은 십오 년만에 내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 <함부로 쏜 화살>(문이당, 1989)에 이어지는 것이란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책을 (이제는 십육 년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지방도시의 한 서점에서 구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문에 정지용의 시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는 기억도.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가장 즐겨읽은 이들은 김현, 김윤식 선생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읽은 평론가도 따로 있었던 것.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그 이유도 대충 챙겨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됐지만 70-80년대 한국문학 평단을 주름잡던 이들로 주로 '문지'와 '창비' 계열의 평론가들을 꼽는다. 전자의 4인방이 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이고 그리고 후자의 양 거두가 백낙청, 염무웅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을 내던 이들이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역임한 김우창, 유종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각각 몸담고 있던 잡지/출판사(=물적 토대)를 근거로 하여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 그려냈었다. 물론 각 진영의 문학적 입장/태도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암시해주는 것은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책들이다.

 

 

 

 

가령 '창작과 비평'의 얼굴은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였으며, 내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문학과지성'의 책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혹은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이다(80년대에 나온 이론서 <소설과 사회>나 <구조시학>은 생각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론) 지향적이란 비판도 들었던 문지의 경우, 확실한 외국 이론가를 거명할 수 없는 건 일견 아이러니컬하다. 거기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곧 민음사 진영에서 내세운 건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내 글이 걸어온 길'에서 그 내막을 잠시 엿볼 수 있는데, 삼십대 후반에,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 2년간 미국유학("내 평생의 유일한 학생 생활")을 가게 된 저자가 이때 주로 접하고 읽은 이들이 벤야민, 곰브리치, 아우어르바흐, 피터 버거 등등이었다. 김우창 교수와의 공역으로 <미메시스>가 처음 나온 것이 1979년쯤인바 이 유학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미해볼 만한 것은 아우얼바하(아우어르바흐)의 저작이 2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망명지' 터키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 저자의 베스트셀러였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시란 무엇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하면서도 문학만의 독자적인 질서와 규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유종호의 태도는 '망명문학적 태도'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일조한 글이 '내 정신의 망명처'인바, 거기서 저자가 '망명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아트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경배하는데,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최근에 간행된 대화집에서 조금 별나게 피아노 협주곡 9번을 가리켜 '세계의 경이의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21세에 작곡한 이 작품이 모차르트 최초의 걸작이라며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자신과 그의 음악 모두가 '세계의 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116쪽) 

그러한 예찬을 배경으로 하여 정의하자면, 망명문학적 태도란 문학의 표준을 예컨대 음악에 두는 태도, 예술로서의 문학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믿는 태도이다(예술로서 음악이 갖는 특장은 아무런 적극적 지시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바, 김종삼의 시구를 빌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비평가로서 유종호가 가장 음악적인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대략 그러한 태도와 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우리시의 가장 '눈 밝은', 아니 가장 '귀 밝은' 독자에 속한다). 사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 작가/비평가의 사회적 책무가 유난히 강조되어온 우리 현대사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소설은 김동리를 좋아하고 평론을 김동석을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자기 분열증적인 버릇'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파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것이 정직한 것(태도)"이다. 해서, <비순수의 선언>(1962)으로 평론가로서 첫발을 떼었지만, <문학의 즐거움>(1995)에 탐닉하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애로는 없었을까? 우리말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식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넘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인데, 그러한 거부감은 이론이나 학문(과학)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진다(특히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문학/예술에 대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다): "고전연구는 별개지만 문학연구가 과연 학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체 없는 소설이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산문을 읽지 않는다." 그의 현재: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때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열받게 마련인 난세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젊은 학생들과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늙어가는 징조이다. 모차르트도 상전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고사를 상기하면서 삶이 안겨주는 강제를 견디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179쪽, 강조는 나의 것)  

때로 상전(=권력)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던 게 천재 모차르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은 곧바로 예술로서의 문학이 처한 운명이자 비평가 유종호의 운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낸 <사회역사적 상상력>(1987)의 머리말에 그가 쓴 대목: "그 어느 때보다도 글쓰기에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민족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은 계속적인 충격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는 있는가? 아무렴, 캄캄한 밤에는 어둠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번안한 시구로 겨우 노여운 무력감을 달래었다."(177쪽) 그가 간혹 굴욕 속에서도, '노여운 무력감' 속에서도 삶의 강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란 '망명정부'를 현실의 정치권력과는 다른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어둠의 노래'의 소속은 '어둠'이 아니라 '노래'이다). 내가 평론가 유종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서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잘난 선인(善人)들보다는 못나고 소심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을 더 신뢰하는 버릇이 있다...  

05. 11. 07.

P.S. 유종호 선생과는 30년이 넘는 연배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요즘 작가/비평가들보다 오히려 더 친숙함을 느끼는데, 그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비슷한 독서체험의 결과인 듯싶다. 그건 내가 선생만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그가 읽은 책들의 상당수가 러시아 문학작품이어서이다. 유명한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으로 영역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학 초년생 때 읽은 걸 계기로 해서,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고, 연이어 체호프와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역으로 읽었다(요즘에 누가 그렇게 읽는가?). 황동규 선생도 유사한 고백을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풍습'이었을 법한데(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나 서머셋 모옴에 대한 독서도 그렇다), 이 산문집은 애당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에 대한 이야기도 한 꼭지 포함하고 있다(영어명 'Herzen'을 '게르첸'이라고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 읽는 이는 많지 않다).  

게르첸과 관련한 대목은 사실 전공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의 자서전이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나도 작년에 즐겨 찾았었던) '참새고지'(흔하게 부르기론 '참새언덕')에서 저자가 떠올리는 이름이 E. H. 카아의 <낭만적 망명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게르첸. 벨린스키 등과 함께 '아버지 세대'(1840년대 인텔리겐챠)의 거두인 게르첸은 <누구의 죄인가>(열린책들, 1991) 외에도 <과거와 사상>(영역본은 'My past and thought')이라는 걸작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정치적 교리에 매이지 않은 그의 <나의 과거와 사색>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 읽히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다."(54쪽) 작년에서야 비로소 방대한 분량의 원서를 모스크바에서 구했지만(나는 영역본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선 번역의 적임자도 아니지만 좀 찔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한편, 게르첸은 73쪽에도 등장하는데, 그때 '지상 최고의 회고록'이라고 지칭되면서 홑따옴표가 아닌 (도서명을 나타내는) 겹낫쇠가 쓰이고 있다. 교정상의 실수일 것이다. 또다른 실수는 144쪽에서 '돈후안'의 원어를 'Don Huan'으로 잘못 병기한 것('Don Juan'이 맞다). 또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연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142쪽) 같이 수식어구가 너무 장황한 문장은 다른 저자들의 글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유종호답지 않은 문장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의 문장들은 튀거나 화려하지 않기에 독자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지만(물론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초판을 빌려다 읽은 <비순수의 선언>은 20대 신참 비평가의 문장으로선 너무 정연하여 나를 기죽인 바 있다) 제 몫의 쓰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주제넘는(오버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는 그에게서 특징적이지만, 저자는 문장에 있어서도 '오버'를 경계한다. 그것이 그의 온건한 균형감각을 이룬다. 그 균형감각은 따로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앞에 인용한 대목에서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저자는 토로하기도 했는데, 작년에 그가 낸 책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는 그러한 '정당화'의 시도로 여겨진다.  

      

 

      

 

'내 삶의 소롯길에서'란 글에서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건네주었던 소년시절의 한 친구를 회상하며 그가 내리는 결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참으로 진실 육박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 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적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요 왜곡이지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점 우리는 모두 살아온 과거를 될수록 정직하게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전후를 다룬 대부분의 소설이나 실록이 내게는 모두 황당한 '창작'으로 여겨진다."(166쪽) <나의 해방전후>가 나오게 된 소이연이겠다. 더불어, (육박적)'진실'은 유종호 비평의 또다른 축이다. 그의 비평은 시(=즐거움)와 진실 사이에 있다.    

책에는 난생 처음으로 저자가 경험한 '한가하고 자유로운 방학'(막내딸이 머물고 있던 미국의 엠즈라는 대학촌 체류기)의 부산물로 얻은 시 한편이 소개돼 있는데(127-8쪽), 제목이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이다. 알고 보니, 작년에 나온 시집의 표제시이다. 6연으로 된 시의 5연은 이렇다.

시끌시끌 막가는 아침의 나라에서/ 시새워 죽을 쑤는 동강난 산하(山河)에서 
터벅터벅 육십 년/ 무슨 반딧불을 보자고/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숨가뻐온 것인가

서산이는 서산나귀로서 청노새처럼 사람들의 짐이나 나르는 짐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서산이'와 '청노새'의 삶을 위로하고 ('알게 뭐냐며')초극하는 '반딧불이'에 다름 아니겠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내 마음의 망명지'일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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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 > 책을 빌려주는 사람

 

알라딘을 모르기 전에는 세상에서 나만큼 책을 좋아하다 못해 집착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비관(?)했었다. 주변이 워낙 책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기도 하고 단지 취미로만 책을 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참 별난 괴팍한 인간이로구나라는 시선을 어지간히도 받았는데, 인터넷이라는 세계에서 도처에 사는 다양한 군상들을  엿보다보니 나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적이 안도한 기억이 있다.


남의 집엘 가도 제일 먼저 책장으로 가서 소일하는 습관이 있다.  누구의 어떤 책을 읽는가를 통해 그의 성향과 성격을 가늠하기도 하고 내가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고 덤으로 빌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내 어린시절은 지독히도 빈곤해서 늘 책에 굶주렸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할 정도로 읽을거리가 늘 부족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스로 돈을 벌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을 사고 읽고 쌓아두는 일이었으니. 그런 나를 보고 가족들은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나 의아해했다. 성공하고 싶은 생각도 부자가 될 맘도 없이 오로지 책만 읽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책을 너무 좋아하면 가난해 진다더라고 하던 걱정이 씨가 되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빈곤은 여전하고 그럼에도 책을 읽어댄다. 말 그대로 즐거운 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책읽기다.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최고다. 빌려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도 선뜻 책을 내밀며 읽어보라고 하면 나는 아이처럼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막연히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데는 서툴지만 내게 책을 빌려주었던 사람만은 생생히 떠오른다. 그 날의 장소와 시간까지도.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늦은 저녁에 빈 교실에서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건넸던 그녀, 작고 영민하던 얼굴과 길고 검었던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뜨린 몇 살 위의 언니이자 친구였던, 잘 살라고 등이라도 두드릴 듯 애잔하게 바라보던 그녀 앞에서 나는 울었던가. 이별이 슬퍼서였는지, 약한 몸으로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처럼 비장하던 맑은 눈이 예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코, 쉬운 길을 노래하며 걸어가지 않았을 그녀가 그립다. 나는 그녀의 책을 족히 서너 번은 읽어치웠다.


오늘, 세상의 악습과 부조리와 가난과 소외, 숱한 상처들에서 무심하지 못하고, 번민하고, 회의하고 좌절하다 어느 순간,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 웃는, 좋은, 어린 그녀가 책을 빌려줬다. 한 아름의 책을 받아들고서도 뭐라 말을 못했다. 너무 좋으면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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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찬별 > 샤먼의 코트
샤먼의 코트 - 사라진 시베리아 왕국을 찾아서
안나 레이드 지음, 윤철희 옮김 / 미다스북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재미있게 읽었다.

누구에게나 환상적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런데 이 환상적인 세상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많이 다르다. 어떤 사람의 환상은 사막에 있고, 어떤 사람의 환상은 타히티에 있고, 어떤 사람의 환상은 저 푸른 초원에 있다.

나의 환상은 시베리아에 있다. 캐나다에 있다. 저 얼어붙은 벌판, 사시사철 눈보라가 휘날리는 곳, 그 눈보라 가운데 외롭게 서있는 초라한 오두막 하나, 어린 딸은 화롯가에서 장난을 치고 있고, 볼이 튼 마누라는 무뚝뚝한 얼굴로 수프 같은 것을 젓고 있다. 나는 보드카 같은 것을 마시면서 깃털 펜을 끄적이고 있다.

어렸을 때 본 만화의 한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나는 것이 은하철도 999에서, 빙하기가 다시 오는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철이에게 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시베리아는 그런 내 환상의 빈 터다.

샤먼의 코트는 그 환상의 빈터에 소설적 영감을 잔뜩 불어넣어주는 - 사실 내용상으로는 대단히 그럴 내용이 아닌 이야기다. 러시아가 어떻게 원주민들을 정복해 나가고 착취해 나갔는지의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러시아가 원주민을 정복해나간 것과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정복해나간 것의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작가는 그것이 다르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평이한 문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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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스파피필름 > [퍼온글] 강유원/ 내가 공부하는 방법

강유원,  '내가 공부하는 방법'


1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2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3
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4
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5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6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원, '내가 공부하는 방법', <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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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나도 매저키스트이긴 한데.... 흐음....;;;
(2004.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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