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미국에서 생중계 되는 메이저리그, 박찬호의 등판경기를 보기 위해 일찍 잠을 깬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문을 들고 와 '문화'면 부터 읽기 시작한다. 예전에 좋아하던 스타의 자살소식에 잠시 놀라지만 그뿐, 긴장감 있는 음악과 함께 마치 게임을 즐기듯 전쟁을 중계하는 미디어의 뻔뻔스러움에는 이미 단련 된지 오래다. 가끔씩은 햄버거와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지고 나른한 오후에는 언제나 스타벅스의 커피 한잔이 떠오른다. 인간은 끝없이 매일매일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재화 역시 문화의 혼합물로 본다면 생존을 위한 소비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매일 문화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장 피에르 바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문화와 문화상품이 다른 것이라면 더 정확히 말해 '문화상품'을 소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문화의 시대 그러나 문화의 세계화는 없다? 현대는 문화의 시대이다. 젊은 사람들은 문화관련 산업에 종사하기를 희망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멤피스트 제도는 해마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한다. 지난 세기 동안 문화는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자 화두였다. 정부에서는 갖가지 문화정책을 만들어 집행하고 단체들을 후원하며 우리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전통문화재들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선정 되도록 힘쓴다. 그 이면에는 문화를 보호하고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지만 속된말로 돈이 되는 산업 이라는 경제적인 파급효과 때문이기도 하다.이 책 <문화의 세계화>는 나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기 보다는 더 많은 궁금증과 복잡한 질문을 만들어 주었다. 미국은 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들의 동맹국으로부터 전혀 존중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지만 무조건 동의할 수 없었으며 문화의 선진국(그렇게 말 할 수 있다면)이라는 프랑스인의 관점이라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장 피에르 바르니에의 역설적인 주장처럼 인간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계이므로 문화의 세계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제품, 문화를 소비한다고 해서 나중에는 결국 같은 사고방식, 문화를 갖게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세계화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다. 바로 그러한 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경계심이 문화적 주체성과 자각을 불러일으켜 문화의 세계화를 이루어질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문화의 단절을 경험했던 지난 역사에 비추어 원래 우리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민족 고유의 사상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체성을 지키라는 것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팝콘대신 떡을 먹으라는 류의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전통문양을 응용한 디자인만이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형태는 모던해도 그 안에서 우리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이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을 갖고 진정 한국 문화라는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문화 산업의 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의 문화가 허용한다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우리의 것도 내보낼 수 있다. 문화의 혼합은 말 그대로 혼란스럽지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내보낼 것은 내보내는 문화의 융합은 안정적이고 더 큰 시너지를 창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