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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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알라’ 외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 그래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고르게 되었다. ‘악법도 법’ 이란 말은 와전된 것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수긍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은 것이다.

「파이돈」은 처형되기 직전의 소크라테스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성을 갖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성을 가진다. 죽기 직전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긴 담론에서 그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아 정말 놀랍다. (아마도 플라톤의 창작이기에 그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겠지만, 그의 사상을 계승한 그가 스승의 뜻에 어긋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하게 죽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는 말이 어디 쉬운 것인가? 아니다. 죽음을 아무리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자도 이별은 슬픈 것이다.

철학자는 항상 죽을 연습을 하는 자들이다, 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매사에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그들의 생각으로 바람직한 사람이 아니다. 비록 ‘철학자’라는 말을 썼지만, 그들 일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를 처형하고자 했던 사람들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된다. 의심이 많았던 케베스가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재논증을 해달라는 말에 ‘삶이 있다면 죽음이 있다(혹은 여러 가지 개념엔 그 반대가 있고, 죽음이 없다면 삶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논리를 말하는 것도 그렇다. 진정한 쾌락은 ‘육신의 쾌락’ 보다는 ‘정신적 쾌락’이고, 육신적 쾌락을 추구 할수록 육신에 매달려 처절한 타락의 길로 가게 된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실 그들을 미워했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이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며 망가지는 모습에 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를 계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자네들이 마법으로 그 두려움을 쫓아버릴 때까지 매일 마법사가 주문을 외도록 하세.”

하지만 그들은 마법사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의 답변에서 드러난다. ‘당신이 죽고 나면 어디서 훌륭한 마법사를 찾을 수 있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 소크라테스는 그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쫓을 수 있는 ‘마법사’로 여겨진다. 그 정도의 두려움 없음을 사람들이 알아줄 턱이 없다.(차라리 그것은 무모함이라 불린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는 항상 배운다. ‘정체성을 세우라,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담대하라’ 등 수많은 말들을 배웠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인 것은 그의 모습이 기독교적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신비주의자들(유대교로 짐작됨)의 말을 일부 수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식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교회가 선전하는 구호를 보면 믿음 외에 철학이나 그 어떤 수단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수긍한다. 내 시선으로 보면 최대한 인간의 중심에서 변명을 했지만, 어딘가 조금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파이돈」은 인간의 수준으로 최대한 할 수 있는 죽음과 인간과 영혼의 존재에 대한 ‘변명’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의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한 지식은 상기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조금 공감했다. 나는 습작하는 시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직도 숨겨진 옛날이 많으며, 그 안에서 배울 것이 많다. 시도 그렇게 쓴다. 하지만 과거에 매이지는 않는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향해 뛰쳐나가는 온고지신, 이라는 말을 다시 새기게 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저 인상 깊은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파이돈」과 「변명」을 읽은 나는 그에 대해 엄청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자 하면 사람들과 괴리되어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기 쉽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는 유토피아처럼 불가능한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무조건 그렇지는 않고 우리 안에 있다. 「논어」나 「맹자」같은 것도 전부 대화이다. 현실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철학의 반영이다. 철학을 너무 딱딱하게 생각했던 나를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 뒷면도 인상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에도 있다, 라는 말은 참 인상 깊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신념을 위해 핍박받거나 목숨마저 위협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글은 작자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철학(혹은 신념)이 없는 것 또한 빈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흐트러져 있던 나의 가치관을 바로 잡고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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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75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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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 그가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늙은 스승이 말했다 기교보다 마음을 익히고 사람의 눈보다 마음을 넘으라 그는 사람의 마음을 넘는 마술사가 되었다 스승이 죽으면서 당부했다 결국 상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꽃을 피우고 새를 날리는 마술사는 마음의 빈터에서 재주를 부렸다 왕이 그의 이름을 듣고 재주를 보았다 왕이 마술사에게 마술의 비결을 물었다 마술사는 거부했다 마술이 모습을 드러내면 마술이 아닙니다 마술사를 斬하고 왕은 마침내 마술의 느․린․동․작을 보았다 그 왕국의 마술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마술의 꿈」 전문


처음 이 시를 보고 찡긋했다. 삶이라는 게 몽땅 마술이 아니겠냐고, 예수님을 비롯, 세상에 내로라하는 성인들은 대개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결과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도 문제가 있지만, 결국 그들은 보이는 것의 덧없음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진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넘어 사는 것에 성공한다.

시인은 이 세상이 마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스승은 상대방의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가지는 방법은 왕이 요구한 대로 이 마술의 비밀을 폭로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할까? 마술사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마술이 형상을 드러내면 마술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절묘한 사실인가? 아름답게 살려고 용을 써대는 사람들도 제 형상을 드러내면 약하고 힘든 인생이기 그지없다. 하나 그런 모습들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이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 밝혀진다는 것은 허무함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마술사의 생명은 유지될 수 없었다. 자기 고집을 유지했던 성인들이 죽었던 이유(특히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아닐까. 삶이라는 게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거늘…. 그래서 그 왕국의 마술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가지는데 실패한 그는 斬首 당하고 만다. 호기심과 환각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 당면해 있는 지식인의 서글픈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왜 이 시집의 제목은 얼음시집일까? 나는 얼음보다는 얼음의 뿌리인 물이 들어가 있는 시를 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산 어둠이나

꽃피는 소리, 만월도 비추인다

슬픔으로 된, 가장 슬픈 것이 와서

달빛 깔고

흐르는 물

의 안팎에는 폭포 쏟아지고

불붙는 영산홍 따위도 피었으니

金銀의 소리 내는 별보다 더 빛나는,

病의 한쪽을 감싸고 깊어지는

물의 우레

붉은 영산홍은 저 아래 있어

病 안으로, 물의 울음 속으로 내려가

깜깜한 영산홍 뿌리 껴안으며,


유월엔 앞을 바라볼 수 있으리

                        ―「물」 전문


이 시에서 드러나는 물은 슬픔이다. 한데 이 슬픔은 따뜻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슬픔이 왜 발생했는가? 그 물의 흐름을 살펴봐야 하겠다.


세상 가운데로 흐른다

꽃은 비름풀 따위에도 촘촘히 피어

물소리 내고

마음은 들끓고 있다

멀고 가까운 산은

베옷자락처럼 깊은 병처럼 눈물처럼 연기처럼

맑은 날 치솟아

어디서나 강은 늘 시작하고,

                                ―「강」중에서


물의 흐름은, 열정이다. 그 열정이 왜 이렇게 식어 얼음이 되었는가? 어떤 식으로 가공되는가?


「얼음시」는 이런 과정으로 되어 있다. 한때는 열정이었던 물들이 슬픔 가운데 굳어 나아갈 길만을 기다리는 도정인 것이다.


얼음 깎아 빚은

볼록 렌즈로

불지르면

저 가파른 겨울산들,

타올라 

붉은 산 되리

                        ―「불」


여기서, 얼음시의 부제가 왜 '불' 이라는 점이 열정이었던 물들을 식게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렌즈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당연히 확산이다. ‘불지르면’이란 시어에서 알게 되듯이 시인은 기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이 시를 읽으면 확실해진다.


어느 날 그의 흙바람내 나는 서랍을 뒤져보았다

스스로 고독한 차르라 칭한 아우의 비망록,

악필이었던 글씨는 여전했고

[……]

나는 혼자일 때는 머나먼 섬까지의 뱃시간을 베끼고

문득문득 아우가 보낸 편지가 왔다

[……]

밤에 스피노자를 읽으면

집 근처 신기료 사내는 마치

우리들 보행의 자유를 위해 신발을 고치는

도시의 스피노자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편지」 중에서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고 한다. 그것이 '보행의 자유를 위해' 신발을 고치는 스피노자처럼 열정속에서 타오르는 슬픔, 역설적으로 슬픔 속에서 무한히 타오르는 열정을 그린 것이 이 시집이다. 하지만 결론은 ‘얼음’이다. 현실은 얼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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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사람들 시작시인선 16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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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끔찍하다. 버려진 사람들이라니?

노숙자들은 자신들이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가 버린 사람으로서, 나는 영등포역이나 서울역을 지나가면서 그런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본다. 연기자의 입장에 서더라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주인공의 헛주먹에 나가 떨어지며

좀더 폼을 잡을려면 N.G

네 꼬라지를 알아,

감독의 신경질이 은박지 조명판의

햇살로 눈부시고

                      ―「엑스트라」 중에서

 

그도 열심히 살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더라도 “네 꼬라지를 알아” 한 마디면 끝나는 것이다. 아무리 우겨도 하층민은 하층민인 것을, 아무리 우겨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하층민들의 삶엔 깔려있다.


꿈꾸지 않으면 우린 싸늘히 식어,

뼈마디마다 놀 붉게 타는 걸음으로

중랑천을 흐르면

                      ― 「중랑천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미움을 받는가? 이미지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둠을 타고 그대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서

아주 교활하게 흔적도 없이 날아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야금야금 피를 빨지요

                      ―「뇌염모기」


망치질 앞에 맨대가리를 내민다

[……]

세상 밖으로 드러난 실뿌리들은

햇살에 더욱 불 달구며,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운 쇠의 근육의

무덤 속에 눕는다 언제나 자궁인

그 소실점에서

                      ―「못」


그도 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죄의 콘트롤이 있다면 그냥 그대로 살게 될 것이다. 노숙자 주변에 다가가든가 멍하게 쳐다보면 변 당할 각오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도 자신에게 죄책감은 있지만 능히 벗어날 수는 없는 심경이다. 소실점, 자궁이 될 수도 있는 곳이 왜 무덤이 되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 그 여건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각오하면서 별일을 다 하던가. 시인 ‘김신용’은 그런 일을 겪으며 이 자리에 온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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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욕하는 가구 문학과지성 시인선 240
최영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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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는 상처받은 것들이 많다. 수술한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서 폐선, 가구, 매미 등… 상처받은 모습이 자신과 상관없는 모습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삶을 사는데 상처가 꼭 필요하다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을 모르는 사람이다. 상처는 세상 그 자체요, 상처가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키우기 때문이다. 상처는 나이테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일광욕하는 가구」, 그 시에 다루어진 내용은 중년 부부의 모습이다.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

[……]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일광욕하는 가구」중에서


신선하다. 중년의 그을린 살자국, 영락없는 가구다. 어떻게 말해보자면, 일광욕을 한다는 건, 나쁘게 생각하면 ‘버려졌다’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이 시는 암담의 일로를 가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생각은 끝에서 반전한다. ‘음지의 근육’이지만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있으며(나쁘게 생각하면 그럴 힘도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얼굴들이 일광욕으로 햇살에 쨍쨍해져 생활의 빛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양은 시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自序에 기록했듯이 그는 수술을 받은 사람이다.


다시 봄 오기 전에

몸에 세 번 머리에 한 번

전신 마취한 수술 자리를 만져본다

그 칼날 아직 서늘한지

빛나는 무공 훈장을 어루만진다

아픈 흔적들 아직 날카롭게

나를 잡아당기고 있어

                                ―「알, 수술 자리」


수술자리를 훈장이라 말하는 그야말로 놀랍다고 하겠다. 수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데, 병마와 싸워 따낸 ‘빛나는 무공 훈장’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평생의 대부분을 고통 속에 지내왔던 것이 있다. 그것은 매미다.


땅속 십 년을 견디고

딱 보름쯤 암컷을 부르다가

아무 화담이 없자

아무 미련이 없자

툭 몸을 떨구는 수매미 한 마리


새야 바람아 찬 냇물아

지지솔솔

씽씽짹짹

이제 너희가 지저귈 차례다.

                                ―「매미」 중에서


매미는 수많은 고통을 업고 살아왔다. 그 생의 낙이라 할 수 있는 암컷도 화답이 없다.(한 마디로 암담하다) 하지만 시인은 매미의 바톤을 새, 바람, 냇물이 이어받는 것으로 처리한다. 이겨낼 방법이 없는 그의 슬픔, 그것이 아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바로 푸조나무가 있다.


잎 하나 떨구는 발꿈치 아래

한 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 번은 당신 남의 님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잎」중에서


이 시는 ‘푸조나무 아래’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기에 갖가지 이유와 수식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함으로 세상을 이겨냈던 것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눈이다.


쏟아졌던 날이

쏟아졌던 날들을 지우는구나

더는 어두운 것을 덮으려 하지 말고

어두운 것들 옆에 만천하에

도드라지며 내려라

더는 아름다운 것을 덮으려 하지 말고


가려무나

다 길이 되어버린 세상.

                                ―「폭설」


그렇다! 모든 것은 길이 되는 것이다. 지나갔던 날들은 묻어버리고 어두웠던 날들도 당당하게 인정하면 이런 나날들이 어려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여기에 재시작의 증거마저도 남긴다. 그것은 폐선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언제부터 멈추어 있었을까

마냥 바다로 뱃머리를 향하고 있는 자궁,

[……]

긁히고 찢긴 날갯죽지마다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는다.

기관실 갑판 흙먼지 쌓여

또다시 물을 이루고

봄이 되자 바다를 넘어온 새싹들이

잎을 피운다.

[……]

갯쑥부쟁이까지 피면 다시 출항이다.

                                ― 「폐선」


누구나 원대한 꿈을 품지만 그것으로 돌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의 꿈은 그렇게 버려지고 있지만 뱃머리는 언제나 꿈을 향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새살의 증거이며, 기관실의 흙먼지도 다시 물을 이루고(다만 이것을 믿지 못할 뿐), 봄이 되면 새싹들이 잎을 피워, 예전과 다름없는 나날들이 돌아올 것이다. 여러 가지 꽃들이 다 피고 나면, 다시 못 쓸 것 같은 배도 드디어 출항! 사람들은 이것을 못 믿고, 해야 할 때 전력투구하지 않거나 절망에 빠지는 것이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대미지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내 눈이 알지 못하는 조그만 티가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좋은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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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물고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67
차창룡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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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협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보통 스님 나오는 드라마를 보노라면, 선행을 베푸시오, 와 색즉시공, 공즉시색(순서가 맞는지...?)이라는 말이 나온다. 『색즉시공』이라는 임창정․하지원 주연의 영화를 내가 다니던 학교… 장안대학에서 찍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다.

아무튼, 이 시집은 불교적인 시어가 빈번하게 나온다, 아니 불교적 사고 자체가 이 시집을 점유하고 있다. 나는 지독히도 불교랑 연이 없다. 풍경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산사도 유명한 데만 슬쩍 들락날락 한 게 전부(금산사나 선운사, 석굴암 정도)이다. 하나 몇 번 지하철에 있는 명상문구 비슷한 걸 보니 곁다리로 아는 정도다.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


여의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도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나갔지만

                            ― 「나무 물고기」 중에서



첫 연은 윤회사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연은 공즉시색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파괴되어도 있는 것이요, 있어도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끝 연에서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은 파괴되어 있다. 아무리 불교사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눈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끔 창동역의 주인은 비둘기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오

[……]

비둘기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똥을 싸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가끔씩 바닥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태곳적부터 그들이 여기서 살았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오

그들은 청량리역이나 서울역 영등포역에 둥지를 튼 사람들처럼

[……]

열차 속으로 숨어들고 만다오 그러나 비둘기들을 사람들은

평화의 상징이라고 한다오 아 이런 노래가 있다오

[……]

생각해보면 비둘기는 평화로운 동물임에 틀림없기도 하다오 기차에 치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가 유지되는 걸 보면

평화의 상징임에 틀림없다오 나는 오늘도 피묻은 창동역에서

니르바나에 잠겨 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오

                            ―「창동역 비둘기」 중에서


가다보면 탁탁 치이는 게 비둘기다. 그들은 창동역의 주인이 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텃세를 부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평화의 상징’이라 부르지만, 결국 그들은 열차속에 숨어든다. 비둘기는 기차에 치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눈, 불교적 사상의 눈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불러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니르바나(열반)’에 잠겨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파괴되었지만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날아오를 저 비둘기들이 그의 모습을 대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려가라 트레드밀*이여

정진하라 자전거의 페달은 끊임없이

법(法)의 페달을 돌려라

자전거는 결코 가지 않을 터이니

자전거를 타지 못할지라도 안심하라

우리들 몸의 허물이 벗겨져서

새로운 허물이 자리 잡을 것이니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못생긴 프시케여

어서 버터플라이**에 오르라

[……]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구르지 않는 바퀴가 곧

법륜(法輪)이니 구르지 않는 바퀴를 끊임없이 굴리다 보면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드는 것이 그것이니라 그리하여

몸을 혹사하는 것이 몸을 경배하는 것이니라


* 트레드밀 : 흔히들 러닝머신이라고 하는 회전식 벨트 위에서 달리는 운동기구.

** 버터플라이 : 나비 모양으로 생긴 운동기구, 가슴 근육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헬스클럽에서」 중에서


불교적 사상이 제일 잘 그려진 시이다.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을 통해 사상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우리 세상이 굴러간다, 굴러간다 하지만 어디 굴러가던가? 어차피 ‘돌고 도는 게 인생이야!’하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우리 세계는 굴러가지만 굴러가지 않는다. 도심에서 드문드문 코끼리만한 버스들이 빠르게 움직여도, 그 것만 움직이는 것이지 세상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은 움직인다. 이렇게 답답한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헛바퀴를 돌듯  하고 있으면 세상은 변화되는 것이다.

바다는 오늘도 수없이 잘리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잘리네

[……]

너무도 쉽게 잘리는 바다를 한시도 쉬지 않고

갈치는 온몸의 보습날로 쟁기질하네

[……]

갈치를 후려치며 바다는 용솟음쳐 칼날을 갈아주네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갈치는

날카로움의 입자로 뭉쳐진 부드러운 구름이 되네

[……]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내장에서

[……]

갈치가 되네 갈치 속에서 은빛 새떼 솟구쳐올라

갈치의 칼날에 부서지네 산산이 아름다이

갈치는 갈치를 온전히 토막내서 비로소 은빛 새떼

곤두박질쳐 온전히 갈치가 되네 산산히 아름다이

                            ―「갈치」중에서


이 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칼치가 바다를 어렵게 헤쳐 나오는 것을, 시인은 갈치가 ‘온몸의 보습날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를 세상이라 말한다면, 갈치는 사람이다. 그 세상을 헤쳐 나오는 아름다움, 하지만, 갈치가 상대해야 될 것은 비단 바다만은 아니다. 새들은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갈치는 약하지 않아 은빛 새떼는 갈치에게 갈라져 바다 속으로 부서지고 있다. 극복에 대한 의지를 (더구나 끔찍할 수도 있는 말을)미학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 했다.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에서 신랄하게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성은 몇 곳의 시에서 드러난다.


지구가 아니라 지구보다 훨씬 더 둥근

2002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fevernova

‘신성한 열기’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냉철한 녀석은 언제나 입을 꼭 다물고 있다

[…]

광화문에서 솟고 시청 앞에서 솟고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솟아오르는데

이상하게도 지방자치제 선거라는 횃불 사그라들고

노동자 파업의 활화산은 저 혼자만 타오른다

[……]

저임금 노동자가 만든 초국적 기업의 가죽옷 입고

축구공은 둥글다는 단순한 진리를 설파할 뿐

가죽옷 꿰매다 시력 잃은 소녀처럼 눈을 꼭 감은

저기 지구가 천천히 빠르게 잽싸게 휙 돌아서 휙휙

                            ―「피버노바는 우주로 날아간다」중에서


2002년의 열기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피버노바의 어두운 그늘을 잡아내고 있다. ‘저 혼자만 타오르는 노동자 파업’ 속에서 축구공은 둥글다는 진리만 설파하는 축구공, 축구공이 둥글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 소리는 무슨 소리냐, 만약, 축구공이 둥근 것을 세상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다 그런 게 아니겠나,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자신들의 저임금 착취를 합리화하는 악덕 사장이나 국가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상적으로 맴돌 수 있는 시가 표현이 잘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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