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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물고기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67
차창룡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무협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보통 스님 나오는 드라마를 보노라면, 선행을 베푸시오, 와 색즉시공, 공즉시색(순서가 맞는지...?)이라는 말이 나온다. 『색즉시공』이라는 임창정․하지원 주연의 영화를 내가 다니던 학교… 장안대학에서 찍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다.
아무튼, 이 시집은 불교적인 시어가 빈번하게 나온다, 아니 불교적 사고 자체가 이 시집을 점유하고 있다. 나는 지독히도 불교랑 연이 없다. 풍경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산사도 유명한 데만 슬쩍 들락날락 한 게 전부(금산사나 선운사, 석굴암 정도)이다. 하나 몇 번 지하철에 있는 명상문구 비슷한 걸 보니 곁다리로 아는 정도다.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
여의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도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나갔지만
― 「나무 물고기」 중에서
첫 연은 윤회사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연은 공즉시색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파괴되어도 있는 것이요, 있어도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끝 연에서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은 파괴되어 있다. 아무리 불교사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눈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끔 창동역의 주인은 비둘기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오
[……]
비둘기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똥을 싸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가끔씩 바닥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태곳적부터 그들이 여기서 살았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오
그들은 청량리역이나 서울역 영등포역에 둥지를 튼 사람들처럼
[……]
열차 속으로 숨어들고 만다오 그러나 비둘기들을 사람들은
평화의 상징이라고 한다오 아 이런 노래가 있다오
[……]
생각해보면 비둘기는 평화로운 동물임에 틀림없기도 하다오 기차에 치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가 유지되는 걸 보면
평화의 상징임에 틀림없다오 나는 오늘도 피묻은 창동역에서
니르바나에 잠겨 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오
―「창동역 비둘기」 중에서
가다보면 탁탁 치이는 게 비둘기다. 그들은 창동역의 주인이 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텃세를 부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평화의 상징’이라 부르지만, 결국 그들은 열차속에 숨어든다. 비둘기는 기차에 치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눈, 불교적 사상의 눈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불러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니르바나(열반)’에 잠겨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파괴되었지만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날아오를 저 비둘기들이 그의 모습을 대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려가라 트레드밀*이여
정진하라 자전거의 페달은 끊임없이
법(法)의 페달을 돌려라
자전거는 결코 가지 않을 터이니
자전거를 타지 못할지라도 안심하라
우리들 몸의 허물이 벗겨져서
새로운 허물이 자리 잡을 것이니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못생긴 프시케여
어서 버터플라이**에 오르라
[……]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구르지 않는 바퀴가 곧
법륜(法輪)이니 구르지 않는 바퀴를 끊임없이 굴리다 보면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드는 것이 그것이니라 그리하여
몸을 혹사하는 것이 몸을 경배하는 것이니라
* 트레드밀 : 흔히들 러닝머신이라고 하는 회전식 벨트 위에서 달리는 운동기구.
** 버터플라이 : 나비 모양으로 생긴 운동기구, 가슴 근육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헬스클럽에서」 중에서
불교적 사상이 제일 잘 그려진 시이다.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을 통해 사상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우리 세상이 굴러간다, 굴러간다 하지만 어디 굴러가던가? 어차피 ‘돌고 도는 게 인생이야!’하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우리 세계는 굴러가지만 굴러가지 않는다. 도심에서 드문드문 코끼리만한 버스들이 빠르게 움직여도, 그 것만 움직이는 것이지 세상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은 움직인다. 이렇게 답답한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헛바퀴를 돌듯 하고 있으면 세상은 변화되는 것이다.
바다는 오늘도 수없이 잘리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잘리네
[……]
너무도 쉽게 잘리는 바다를 한시도 쉬지 않고
갈치는 온몸의 보습날로 쟁기질하네
[……]
갈치를 후려치며 바다는 용솟음쳐 칼날을 갈아주네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갈치는
날카로움의 입자로 뭉쳐진 부드러운 구름이 되네
[……]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내장에서
[……]
갈치가 되네 갈치 속에서 은빛 새떼 솟구쳐올라
갈치의 칼날에 부서지네 산산이 아름다이
갈치는 갈치를 온전히 토막내서 비로소 은빛 새떼
곤두박질쳐 온전히 갈치가 되네 산산히 아름다이
―「갈치」중에서
이 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칼치가 바다를 어렵게 헤쳐 나오는 것을, 시인은 갈치가 ‘온몸의 보습날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를 세상이라 말한다면, 갈치는 사람이다. 그 세상을 헤쳐 나오는 아름다움, 하지만, 갈치가 상대해야 될 것은 비단 바다만은 아니다. 새들은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갈치는 약하지 않아 은빛 새떼는 갈치에게 갈라져 바다 속으로 부서지고 있다. 극복에 대한 의지를 (더구나 끔찍할 수도 있는 말을)미학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 했다.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에서 신랄하게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성은 몇 곳의 시에서 드러난다.
지구가 아니라 지구보다 훨씬 더 둥근
2002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fevernova
‘신성한 열기’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냉철한 녀석은 언제나 입을 꼭 다물고 있다
[…]
광화문에서 솟고 시청 앞에서 솟고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솟아오르는데
이상하게도 지방자치제 선거라는 횃불 사그라들고
노동자 파업의 활화산은 저 혼자만 타오른다
[……]
저임금 노동자가 만든 초국적 기업의 가죽옷 입고
축구공은 둥글다는 단순한 진리를 설파할 뿐
가죽옷 꿰매다 시력 잃은 소녀처럼 눈을 꼭 감은
저기 지구가 천천히 빠르게 잽싸게 휙 돌아서 휙휙
―「피버노바는 우주로 날아간다」중에서
2002년의 열기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피버노바의 어두운 그늘을 잡아내고 있다. ‘저 혼자만 타오르는 노동자 파업’ 속에서 축구공은 둥글다는 진리만 설파하는 축구공, 축구공이 둥글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 소리는 무슨 소리냐, 만약, 축구공이 둥근 것을 세상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다 그런 게 아니겠나,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자신들의 저임금 착취를 합리화하는 악덕 사장이나 국가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상적으로 맴돌 수 있는 시가 표현이 잘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