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할일없는 주말, 광화문 교보에 가서 두어시간동안 서서 단숨에 읽어버린 책이다. 빛을 사방으로 난사하는 반사체가 주렁거리는 천정, 보드라운 감촉이 서점 직원들의 눈총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리 뻗고 앉게끔 충동질하는 바닥의 카펫, 그리고 실내를 진종일 감도는 보드라운 촉감의 음악들. 이것이 내가 그곳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북적이면서도 오히려 오기로라도 책을 손에 쥐게끔 하는 북매니아들의 열기가 눈에 보이는 듯한...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처음 모 인터넷 서점의 대문에서 발견했다. 연보랏빛의 고급스런 표지에 묵직한 두께, 거기에 감칠맛나는 소개글까지. 지하철 1호선 출입구쪽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새소설 추천코너에서 이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감상? 한마디로 씁쓸했다.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대략 3부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1부는 사건의 발단 즉 주인공의 어린시절을, 2부는 그로 인해 헤어지게 된 비극적인 연인들의 삶을, 그리고 3부는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현재 시점, 즉 노년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이 방대한 이야기 전체를 꿰뚫는 주제는 작가의 다소 슬픈 운명론이다. 과학시간에 많이들 들어본 '나비 효과'처럼, 사소한 참견. 실수. 오해 하나가 결국 여럿의 운명을 좌우하노라고. 특히 3부는, 과거 자신의 크나큰 잘못을 뉘우친 주인공과 그 피해자인 연인의 화해로 잘 마무리되었나 싶었더니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말로 '툭 던지는 듯'이 일의 전모를 갑작스레 드러내는 형태로 나를 상당히 놀라게 했다. 구식에 진부한 고집이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을 바라던 나로서는 참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 긴 여정 동안 얼기설기 섞인 각자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마치 촘촘한 그물코처럼 세심하게 자아낸 작가의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완벽한 논리적 사실관계를 창출해 내려는 듯한. 하지만 번역 과정의 문제일지 아니면 작가 나름의 개성일지 모르겠지만, 너무 토를 많이 단 것이 흠이다. 전쟁 씬의 묘사에서는 헉 할 정도의 리얼리티가 묻어나지만 그 외에는 지루한 감마저 들었다. 미국에서는 상당한 베스트셀러였다지만, 기대보다는 범작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훗날 다시읽을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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