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이기적 유전자] 30주년 기념판 작가 서문에 보면, 일부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와 엄청난 우울감과 삶의 균열을 호소했다고 한다. 특히 어릴 적부터 종교(특히 기독교)에 길들여졌지만 왠지 모를 막연한 의문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어떤 외국인 교사는 한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 인생이 허무하고 목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기에게 찾아왔다고 내게 항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허무주의적 염세관에 물들지 않도록 그 학생의 친구 누구에게도 이 책을 보여 주지 말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도킨스 옹은 이렇게 답한다.
어떤 진실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 진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따스함을 과학이 빼앗아 간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잘못이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지도 않은 나를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우리의 뇌는 이기적 유전자에 배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정도로까지 진화했다.
작년 과학분야 베스트셀러였던 이 물고기 책도 이런 모순, 의문, 균열에서 출발한다
생화학자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늘 딸들에게 '너는 중요하지 않아. 인생의 의미는 없어. 신도, 내세도, 운명도 없어.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러니 너 좋을 대로 살아.'를 강조한다.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의 탄생은 혼돈일 뿐, 우리의 삶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래도 이 아버지는 '광대 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처럼 인생을 활기차고 대범하게 잘 살았다.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살아가라.'를 아주 충실히 지키면서.
다만 그 자식들은 그러지 못했다. 큰언니는 심각한 사회부적응자에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동생인 저자는 이미 10대에 자살기도를 하고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떠돌다가, 과학기자가 되면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이자 어류학자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과학자.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1/5을 동료들과 밝혀냈으나 지진 또 지진으로 모든 게 박살나고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기인. 그 그릿(grit, 끈질긴 투지)이 나중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려 문제가 커졌지만.
이 책의 최대 반전은, 픽션처럼 시작했던 이야기가 결국 논픽션이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나도 진짜 그런 어류학자가 있는지 검색해봤고, 진짜 있었으며, 이 책이 출간되고 그의 행적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인디애나대, 스탠포드대에서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들을 모두 개명해 버렸다고 한다.
사실 읽기가 쉽지 않다. 단어들은 갑자기 튀어오르고 서술은 툭툭 끊어진다. 유려한 문장은 아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들춰보았을 때 은근히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결국 세상을 살 만하게 하는 건, 작은 따스함과 그로 인한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라는 것.
-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혼돈 속에서 기나긴 우회로를 지나 스스로의 행복을 찾은 듯 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바로 '아빠'에게 헌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