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모험에의 낭만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월튼. 그는 북극해에서 항해를 하다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정체 모를 한 이방인을 구해주게 되고, 그에게서 그의 잘못된 피조물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이 때부터 소설은 마치 양쪽에서 서로를 비춰 자신 속에 끊임없는 자신을 담아내는 두 개의 거울처럼, 월튼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속에 또다시 그의 이름 없는 피조물의 참담한 심정이 담겨 있다.

프랑켄슈타인, 그는 고루하고 진부할 뿐인 평범한 과학 속에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상한 신비에 눈을 뜬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병사로 인한 상처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체 안치소에서의 관찰,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의 과중한 연구,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죽은 자의 몸으로 생명의 불꽃을 피운 한 피조물. 거기서 모든 불행과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잘못된 호기심은 프랑켄슈타인을 더 이상 빅터(victor)가 아니게 만들었다.

비록 인간이 아닌 듯한 흉측한 외모이지만, 선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지성, 그리고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프랑켄슈타인 2세. 그러나 그가 원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단지 외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거부당한 뒤로 그의 정신의 찬란한 광채는 걷히고 창조주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마음만이 남는다.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사탄에게는 칭찬해주고 용기를 줄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었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미움을 받는 존재라니.'

그는 결국 그가 추구했던 그 비범한 능력들을 토대로,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와 가족들을 차례로 살해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안식을 얻지 못한다. 사실 그는 빅터의 행복을 빼앗고 복수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조차, 그에게 완벽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빅터에게 불행을 준 만큼 불행해지며, 마침내 빅터가 죽은 것으로 인해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그 정당화된 슬픈 동기 사이에서 갈등하며 스스로 한 줌 재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모든 것을 잃은 빅터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증오하는 그는.

그러나 무엇이 당연한 것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를 괴로운 존재로 만든 창조주, 그의 선행을 그릇된 편견만으로 파탄으로 이끈 사람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악으로 변질해버린 그인가? 비극은 언제나 무엇이 진짜 진실인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질문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프랑켄슈타인>은 빅터나 그의 피조물만의 비극이 아닌, 인류 전체의 비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의 성스러운 영역을 침범했음에도 온 인류의 축복을 받았던 복제양 돌리가 죽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최초의 실제 프랑켄슈타인'인 셈이다. 비록 방법이나 기술이 많이 달랐을지라도. 곧 인조인간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느꼈던 생생한 공포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그런 풍조에 대해서도 경고장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꼭 그런 비판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다른 작품('괴물'이라 인식 받는 존재가 원한을 품고 상대를 해치려 하지만 결국 멸망한다. <오페라의 유령>, <괴물>,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등)에 비해, 훨씬 섬세하고도 열정적이며, 공포와 스릴보다는 그 이면 뒤에 프랑켄슈타인 2세의 생생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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