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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처럼 떠나다 - 청색시대를 찾아서
박정욱 지음 / 에르디아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피카소를 이야기하지만 피카소 그림은 없다. 그것이 이 책의 큰 특징이라고 꼽고 싶다. 오히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피카소 그림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듯 하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피카소의 그림,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표지 사진만큼이나 청명한 피카소가 살던 동네. 바다가 푸른 것인지 푸른 하늘 때문에 바다가 더욱 파래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건물은 온통 흰색. 창문과 문이 곳곳에 극한 파랑의 색채를 뽐내고 있다. 파랑은 순수함의 상징인 흰색과 조화를 이룬다. 저자는 스페인어를 모르고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곳이 마치 자신을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기운에 이끌려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런 곳이 한군데쯤 있으면 좀 멋져보일 것만 같다.
저자는 예술가 그 자체 같아 보였다. 그림에도 정통할 뿐 아니라 글 역시 문학가, 철학가 뺨치는 표현들 일색이었다. 같은 장소를 보고 오더라도 나같으면 사진 한장에 글 몇줄이면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은데 책 한권이 완성될 정도니. 그리고 공감이 되고 여운이 남는 글들이 많아, 글이지만 하나의 미술품을 보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그 힘의 정체는 바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실 그 자체에 있었다. 그 혼란 자체가 힘이었다. 아무도 예술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 그림 앞에서 혼란에 빠져드는 것이 그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림은 끝이 아니라 무한한 시작이었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를 통해 창조하는 것이다. p144
그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 없어서 혼란에 빠진 적이 많았다. 바른 감상법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유쾌해졌다. 그림은 인간을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인간이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림 역시 아무리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고, 작가를 이해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혼란에 빠져드는 것이 그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강렬하게 내 마음에 와서 박힌다.
우리는 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보아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린 모두 눈 뜬 장님들이다. 그 때문에 화가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피카소의 큰 눈이 생각이 났다. 황소의 눈이라고 스스로 칭했던 그 눈, 세상과 자신을 응시하며 부릅뜬 눈이었다. 이 세상을 보게 되면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오히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이다. 입체파는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경악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p33
왠지 화가의 존재가 '무당'과 같아 보인다. 그런 표현이 저자의 다른 지면에 있었다. 피카소도 저자도 '무당'으로 표현하는 글이. 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보아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나. 눈 뜬 장님이라는 말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어 보인다.
예술은 돈을 벌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철없다는 욕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욕먹는 그대로 인생을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며, 친구들의 돈을 구차하게 빌리는 것이며, 그렇게 사회적 터부를 행하며 폐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지저분해지고 한없이 꼬리꼬리해지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다. 과연 누가 그런 가시밭길을 가려 하겠는가. p134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거울로 비춰주는 듯하다. 지저분해지고 한없이 꼬리꼬리해지는 길. 가시밭길.
피카소가 살았던, 이 책에 나온 그곳에 가면 저자처럼 이런 깊은 사색이 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yes'라는 답변이 되돌아온다면 무턱대고 편도 티켓을 지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