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사랑 이야기
마르탱 파주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에 '아마도'가 붙어 있는 것이 포인트이다.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사랑'에 관한 사색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아마도' 사랑 이야기에 속하지 않겠는가 하는 애매한 제목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이 책. 솔직히 내게는 참 재미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인생'을 살지 않는 주인공, 비르질은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꼭 나 뿐이겠는가. 작가를 수식하는 말에 '프랑스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라는 문구가 있다. 현대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다분히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에서 파리의 에펠탑을 붙잡고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이 책의 주인공, 비르질을 묘사하는 것 같다. 제목 오른쪽 위에 뜬 환한 달빛 안에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읽기 전에는 어떤 사랑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내용은 주인공 비르질의 2주간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다루고 있다.

 

 

파리의 어느 창녀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의 생활은 남들이 보기에 '정상'이 아니다. 지금껏 사귄 여자들의 공통점, 그리고 그의 생각에 '장점'은 그녀들을 볼 수 없게 되도 참을 만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들을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잃는다고 해도 그 아픔이 너무 오래가지 않을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골랐던 것이다.p158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들과 다시 연락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들과의 이별이 너무 슬퍼서 그런 게 아니다. 충분히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p157

 

사람들과 특히 이성과 깊은 교감을 하는 관계까지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주인공. 친한 친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넌 어차피 너를 차버릴 여자들만 고르는 것 같아. 너의 그 병적인 고독을 확신하고 싶은 거지."p149

 

나중에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차단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그가 생각하는 '결별'이란?

 

결별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 또 있을까. 헤어진다는 것은 꼼꼼히 준비한 테러와도 같다. 가슴 속에 폭탄을 설치해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발의 충격을 피할 수 없다.p8

 

'결별'을 두려워하기에 '여행'처럼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랑'을 해온 비르질. 그러면서도 사람의 온기에 갈증을 느끼며 산다.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흔적이 간절하기만 한 그였다.p23

 

비르질은 메시지를 받는 것이 좋았다. 친구든 부엌가구 판매원이든, 메시지를 받으면 자신도 사회 속의 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p7

 

스팸 문자메시지조차 반갑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창문이 없는 작은 고시원 방에서 아침 일찍 진동으로 어느 슈퍼의 광고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다. 바나나가 얼마고 돼지고기가 얼마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아침을 열었다. 그 슈퍼가 참 고맙게 느껴졌다. 대중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지만 그 슈퍼가 그 순간 유일하게 내 존재를 기억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홈쇼핑, 서점 등에서 보내주는 짧은 이메일에 감동하기도 했다. 백수인 나에게 한번씩 보험을 들라는 전화가 걸려오면 어느 날은 핸드폰 너머 젊은 남자 상담원 목소리가 그윽하고 멋있어서, 보험에는 관심도 없는데 흠칫 놀란 적도 있었다.

 

자동 응답기 버튼을 누른다.

"비르질."

여자 목소리다.

그는 매혹적인 멜로디를 한껏 느껴보려 응답기 스피커로 바짝 다가갔다. 하느님은 여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거다. pp.7-8

 

응답기 스피커로 바짝 다가가는 비르질의 모습에서 귀를 쫑긋하며 남자 상담원의 목소리에 집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성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비르질이 애정을 가진 대상은 '파리'였다.

 

그는 파리라는 도시가 사랑의 대상이 될 것임을 다짐했다. 어딘가에는 사랑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파리는 결코 비르질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찾을 때면 언제든지 파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p204

 

어떠한 지역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책 또는 음악, 돌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소통하고 싶으나 '사람'에게 '이성'에게 다가가기를 주저하는 우리는 이처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애정을 쏟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아내','자녀'가 없는 솔로인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고독은 여전히 존재한다.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회사에서 우수한 실적으로 승진을 통보받는 자리에서 비르질은 '승진을 꼭 해야 한다면 사표를 쓰겠'다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왜?

 

비르질은 조용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원했다. 아주 작은 변화 때문에 안그래도 깨지기 쉬운 그의 존재가 허물어져 버린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조에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왜 승진을 해야 하는가? 야심 때문에 타락하도록 자신을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르질이 일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p111

 

결국 노조 사무실에도 찾아가지만 승진과 연봉인상을 철회하기를 원하는 비르질의 요청은 웃음만 살 뿐이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아무 혐의도 없는 비르질이 경찰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매춘 알선'혐의를 뒤집어 쓰고 어두컴컴한 경찰서 지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이 대목은 정말 너무나도 우스워서 배꼽을 잡았다)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일들을 2주동안 갑작스럽게 체험하는 비르질은 책의 말미에서는 초반부와 확연히 다르게 관점이 변화한다.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한다(p246)'는 메세지를 날린다.

 

이 책에서 비르질의 생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주위 사람들 그리고 비르질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더더구나 '비정상'적이고 '특이'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과정이 참 인상깊었다. TV 프로그램 중 독특한 사람들을 이웃 사람이 제보해서 그들의 일상과 왜 그런 특이한 생활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비르질은 그 프로에 나오는 주인공이고 독자들은 시청자와 같다고 하면 근접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알고보면 비르질이 그런 인생을 사는데도 이유가 있었고,(안정을 추구하였던 것은 서커스단이었던 부모님이 늘 옮겨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경험을 통해 비르질은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그 외에도 저자의 예리한 관찰력과 감각적이고 풍부한 묘사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구절들이 있었다. '시장바구니'를 '프라이버시'로 비유한 대목. '걷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기에 '좋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대목, 비르질이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장면에서 '일을 하면 무중력 상태에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한 대목, 아이들의 돌발적이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 길을 건너는 자살행위'등과 같이 '자살행위'로 비유한 대목 등이 있다.

 

저자가 일본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용 중에 일본과 관련되는 단어들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약간 놀랐다. 브리질은 짧은 시인 '하이쿠'를 짓는다든지, 근세시대 유명한 화가인 '호쿠사이 작품집을 훑기도' 했다. 한류 붐과 함께 일본을 겨냥해서 한국드라마에 일식집이나 오뎅가게에서 주인공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자주 넣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일본에 번역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을 겨냥한 것인지, 프랑스 사람들에게 일본적인 것들이 일상생활과 친밀한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특이하게 일본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한번 시간을 두고 알아보고 싶어졌다.

 

조용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원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생활에 질린 사람들에게 특별히 추천하고 싶다.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고, 잠시나마 유쾌한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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