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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오디세이아> 속의 여러 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 안에는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그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전파하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반면, 오디세우스가 10년
세월 동안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들은 모두 귀향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과 관련이 있다. 심지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고향에 도착하고도 그곳이 진짜 고향임을 알아보지 못하며(여신의 도움으로 곧 정신을 차리지만), 그가
이렇게 ‘본래의 자신’을 잊은 것 같은 순간에 그의 입에서는
우리가 아는 오디세이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사실 여러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노련한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다.
<오디세이아>가 단순한 여행기, 모험담, 환상기가
아니라 많은 가능한 오디세이아를 품고 있는(으면서도) 유일한 오디세이아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단순히 여행을 떠났다는 데 있지 않고, 제 자리로 돌아가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데
있다. 그의 나아감은 돌아감이며, 이를 위해 각종 거친 경험과
고통과 고독—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그것—에 농락당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했다. 이러한 삶의 여정을 핍진하게 그려냄으로써 <오디세이아>는 서양문학사에서 길이 빛나는 원형서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오디세이아>
Ø 참고할 작품
<일리아드>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이 작품은 정당성 없는 전쟁에 속아서 동원된 뒤(그러니까 정당한 대의명분은 적에게 있다) 전투에서 참패하고 지휘관도 잃은 채 오직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어딜 가도 그곳의 삶을 파괴하는 집단적 위협으로만 비춰질 수 밖에 없는 1만명의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군인들은 한 마디로 농사를 망치는 메뚜기 떼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나 억울함이란 한 마디도 비치지 않은 채, 군인으로서의 규범을 지키며 오직 눈 앞의 상황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상의 방법만을 논한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위엄과 현대성이 있다. 전쟁을 겪은 칼비노
세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어쨌든 이런 실용적인 윤리(장차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탁월한 표현을 얻은)야말로 현실에서 택할 만한 유일한 것이며, 그 윤리를 떠받치는 것은 다만 공허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이 책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진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아나바시스>
à <페르시아 원정기>,
천병희역, 도서출판 숲, 2011
Ø 국내에 번역된 크세노폰의 작품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 이은종역,
주영사, 2012
<헬레니카>, 최자영역, 아카넷,
2012
<그리스 역사>, 최자영역, 안티쿠스,
2012
<소크라테스 회상>, 최혁순역, 범우사,
1998
Ø 참고할 작품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비교에 쓰이는
다른 작품들은 모두 검색이 안 됨, 국역본 없단 말.
오비디우스와 우주의 인접성
이 책은 신들이 사는 세계를 마치 로마 시민들의
생활을 소개하듯 세심하고 정확하게 소개하며, 그 반대 방향으로도 일한다. 즉 지상세계와 천상세계의 인접성, 그리고 신-인간-자연 간 상호 작용이 이 책의 주제이다.
서술의
톤은 도덕을 어렴풋이 환기할 뿐 담담하며, 이야기는 이야기 속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증식한다. 각 에피소드는 다양한 운율을 따라 속도감 있게 흐르고 이미지는 사라지기 전에 얼른 다음 이미지를 불러낸다. 이 편력하고 분기하는 운동은 현재형 동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느닷없는 호격으로 리듬을 얻는다. 때로는 세부 묘사에 집중하기 위해 운동을 늦추기도 한다. 이런 서술방식을
통해 변신(갑작스러운 육체의 변형)이라는 신화적 현상은 물질적으로 자연스럽고 견고하게 표현된다. 환상이 아니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이 현상, 변신(이를 테면 인간에서 나무로, 혹은 돌고래로)이 그렇게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신과 인간과 자연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통일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철학을 전제로 한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변신 이야기>, 총2권, 이윤기역, 민음사, 1998
Ø 국내에 번역된 오비디우스의 작품
<로마의 축제들>, 천병희역, 도서출판 숲,
2010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김원익역, 에버리치홀딩스, 2010
하늘, 인간, 그리고
코끼리
칼비노의 설명으로 볼 때, 폴리니우스의 『자연사』는 중국의 『산해경』 류의 책인 듯하다.
이 책은 우선 기상천외한 (상상 속) 우주의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신에 대하여도 탐구하는데, 그 탐구를 따라가 보면 신은 어쩐지 인간보다 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은
자살도 못하고 이성(理性)에 반하여 행동할 수도 없지 않나. 다음 장은 인간. 이 장에서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별 희한한 사람들—예를 들면 결혼할
때면 성(性)이 바뀌는 사람들, 개의 머리를 한 사냥꾼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읽게 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같이 불확실한 과정을 거쳐 연약한 상태로 태어나서 결국은 죽음을
통해 부재로 돌아가며, 그들의 행복은 결코 길게 보장되는 법이 없다.
이제 이 책은 “인간성에 대한 소논문을 끝내고 다른 살아 있는 생물체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그 생물체는 바로 코끼리이다. 코끼리는 가장 큰 동물이고 정신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란다. 이 장은 코끼리에 대한 익히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들을 “단 하나의 단어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코끼리의 천적은?
용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자연사>
Ø 국내에 번역된 폴리니우스의 작품
없는 듯.
네자미의 일곱 공주
중세 페르시아의 고전인 <일곱 공주>는 일부다처제 문화에서나 가능한 화려한 서사를
자랑한다. 바흐람 왕이 7개 대륙 지배자들의 딸인 7명의 공주와 동시에 결혼하고, 한 주의 7일을 각각 상징하는 7명의 신부는 조화롭게도 매일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며 특수한 능력을 발휘한다. 책에는 바흐람 왕의 놀라운 업적과 행적, 그와 7명의 신부들이 펼치는 감각적인 육체 활동, 그리고 7명의 신부들이 들려주는 환상적이면서도 때로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좀처럼 끊이지 않는다. 서구 문학에서 아무리 환상적이고 웅장한 작품들 가져다 대어봐도 이 놀라운 언어의
테피스트리이자 은유의 대우주 앞에서는 결국 간결하고 절제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일곱 공주>
Ø 국내에 번역된 카르다노의 작품
Nezami로
검색 결과, 0.
Ø 참고할 작품
마리노Marino의 <아도네>,
바실레Basile의 <판타메로네> à 귀찮아서
검색 안 함.
티랑 로 블랑
칼비노는 이 장에서 기사도 로망이 서유럽 각국에서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를 짚어본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는 기사도 로망을 불태우는 것으로 기사로서의 삶을 끝내는데, 이 때 사제의 손에 의해 불구덩이에서 구원 받는 몇몇 텍스트들의 하나로 스페인 최초의 기사도 로망인 <티랑 로 블랑>이 언급된다. <티랑 로 블랑>의 첫 장은 기사라는 인간 유형은 바로
기사도 로망을 읽음으로써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사도 로망이라는 장르의 쇠퇴는 곧 기사라는
인간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가 숨쉬고 있는 라 만차의 공기는 이미 기적과 도덕적 가치의 세계와 맨 정신의 현실의 섞임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돈키호테는 자신을 기사로 길러준 로망들과 함께 그렇게 극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기사도 로망과 기사의 별종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에서 천천히, 덜
극적으로, 그러나 결국 확실히, 일어났다.
11-13세기에 나타난 기사도 로망은 최초의 대중서로서 당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신곡>은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른 작품 중에서 최초로 이 점을 증언한다. 그
책에서 프란체스카는 기사도 로망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음을 고백하고 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티랑 로 블랑>, 검색 안 됨
Ø 참고할 작품
<신곡>
<광란의 오를란도>의 구조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의 속편으로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아리오스토는 32년 동안 작업을 하고도 작품을 다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끊임없이 교차하고 지그재그로 분기하는 다중심적이며 공시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어떠한 요약도 무효하며
어떤 독법(讀法)도
우월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책의 어느 부분을 펼치더라도, 그
부분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필요 없이, 독자는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구조—편력하는 운동성—는 그 내용의 구조와도 맞물린다. 이 책에는 주요한 이야기 줄기 몇
개가 동시에 돌아가는데, 하나가 드디어 끝날 것 같으면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또 다른 새 줄기로 옮겨간다. 이렇게 이야기의 다리를 건너고 강을 뛰어 넘으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다 보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미로
같은 내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들은 이 거대한 서사시가 벌이는 놀이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광란의 오를란도>, 김운찬역, 아카넷, 2013
아리오스토의 명시선
아리오스토 탄생
500주년을 맞아 쓰여진 이 글에서 칼비노는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인상적인 시구들을 모아 초미니 ‘오리오스토 명시선’을 꾸민다. 끝.
지롤라모 카르다노
칼비노는 햄릿 2막에서
햄릿이 읽고 있던 책이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위안>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위안>에서 카르다노는 끊임없이
(죽음과 같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당시 의학자로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지만 사실 그의 천재성은 꿈, 마술, 운명, 악마와
같은 주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 바쳐진 그의 강박적이면서 선구자적인 노력에 있었다. 이 탐구의
과정은 똑같이 강박적으로 행해진 그의 글쓰기를 통해 남았다. 그는 삶의 모든 면면들을 언어를 통하여
포착하려 하였으나, 언어 자체도 흘러가고 달아나는 본성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의 글쓰기는 24시간 쉴 틈이 없었다. 전문분야에서도 그는 광범위한 오지랖을 발휘, 회화만 제외한(이건 다빈치에게 맡긴 듯 하다) 모든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200권의 저서로 남겼다. 라틴어만이
책의 언어로서 불멸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투르지만 라틴어로만 글 쓰기를 고집하였고, 도박에도 일인자이어서
의사를 그만두고 도박꾼이 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단다. 초보적 과학에 기반한 조화로운 통일의 시대인 르네상스기에
그는 무한히 다양한 사물들,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환영들,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특이한 개인들—사이를 가로지르는 우연과 필연의 교차에 대해 사유하려 하였다. 그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다면 분명 16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위대한
기재(奇才)로 남았을 것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위안>, <나의 생애>
Ø 국내에 번역된 카르다노의 작품
없어!
갈릴레오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갈릴레오 사상의 특징은 세계, 자연, 우주는 거대한 책이라는 오래된 은유에 기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이루는 알파벳—기본 요소들—이 있으며, 이 알파벳들의 끊임없이 다양한 배열을 통하여 우주의 만물을 다 재현할 수 있는 조합체계가 있다는 주장에 있다. 이는 우주에 관한 연구인 철학, 그리고 그 철학을 뒷받침하는 과학, 그 과학의 알파벳이 되는 수학과 기하학에서도 모두 적용되는 원리이다. 수학은
숫자, 기하학은 삼각형, 사각형 등 도형들을 제 알파벳으로
삼는다.
이 알파벳론은
고정된 형체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해 도입되었다. 갈릴레오는 매끈하고
변치 않는 고정된 우주의 상(像)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질적으로 무한하게 다양하며, 개별적인 것들의 생성과 쇠락을 통해서만 대략적인 영구성을 획득하는 우주상이 더 고귀하다고 보았다. 또한 이 알파벳론은 일종의 잠재태로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지 과거로써 미래를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우주라는 거대한 책을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은 책을 죄다 읽고 기억해야 한다는 당대의 ‘방법론’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이렇게
당대의 철학과 갈릴레오의 철학을 각각 대변하는 두 주인공 사이의 언어를 통한 복싱이 바로 <대화>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세계관에 대한 대화>(일명 <대화>)
Ø 국내에 번역된 갈릴레이의 작품
<갈릴레오가
들려주는 별이야기—시데레우스 눈치우스>, 장헌영 역, 승산, 2009
<새로운
두 과학>, 민음사, 1996
달나라의 시라노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와 교황청이 싸우고 있을 때
파리에서는 또 한 명의 리베르탱이 자신의 공상과학소설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옹호하고 나섰으니, 바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다른 세상>이 그것이다. 17세기에 쓴 글들을 통하여 20세기 과학의 여러 발전상들을 이미
예견해낸 시라노는 (갈릴레오와 유사하게도)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에 깊이 공감하였는데, 그 내용은 기본적인 요소들의 변화무쌍한 조합으로 만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써
현재의 DNA 유전학과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당대의
과학지식과 사회에 대한 풍자, 구속 받지 않는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시라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개념들의 일관성이 아니라 지적인 인식에 감지되는 모든 자극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자유와 재미였다. 당연히 <다른 세상>에는 성(性)에 대한 작가의 강렬한 관심 또한 담겨 있었다. 시라노는
살아 생전 작가로서 무명에 가까웠다. 이 책은 작가가 죽은 뒤에 작가의 자유분방함을 향해 쏟아질 비난의
화살을 염려한 마음 착한 친구의 자의적 도려내기를 거쳐 출판되었다. 후세의 독자들이 드디어 그의 매력을
발견한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달나라 여행>, <해내라 여행> à <다른 세상>, 장혜영역, 에코리브르,
2004 (원제는 “다른 세상 또는 달의 국가들과 제국들”임)
Ø 국내에 번역된 베르주라크의 작품
<다른
세상>말고 없어
로빈슨 크루소와 상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관한 일기
대니얼 디포는 상인으로서 그리고 정치 논객이자 도덕적
교훈을 달고 다니는 설교자로서 부침이 심한 젊은 날을 보낸 뒤 모험가-실리주의자-모럴리스트로서 상당한 내공을 쌓은 60 가까운 나이에 소설로 전향하였다.
자전소설의 형식을 띤 <로빈슨 크루소>는 먼저 크루소가 태어나서 배를 타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는데, 이
부분에서 도출되는 교훈(또는 반교훈)은 크루소가 규범에 순종하고 실리를 떠받드는 부르주아 상인의 덕목을 위반하고 모험과 환상을 좇았던
것이야말로 그가 장차 무인도의 고생살이로 떨어지게 된 근본적 이유라는 것이다.
이어 크루소의 배가 난파하고 그가 무인도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부분에서는 디포의 가식 없이 담담하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크루소의 손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물들과 그의 삶에 비추어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되는 사물들이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이 대목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인간의 위대함은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거창하면
거창한 대로, 무엇이든 제 힘으로 만들고 운영해 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
크루소는 신도 종교도 자신의 난감한 상황을 설명하거나 개선하기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무인도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무인도의 야만이 아니라 유럽의 문명이야말로 자신의
진실된 삶(땅에 발 딛고 제 손으로 삶을 꾸려가며 이웃을 용납하는 인간)을 위협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미묘한 심리를 간명하게 드러내는 문장들에는 디포 특유의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유머가 넘실댄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로빈슨 크루소> 번역 본은 많음. 이
중 제일 나은 번역은?
Ø 국내에 번역된 디포의 작품
<로빈슨 크루소> 외에는 <몰이라는 매춘부이야기>(세계문학, 1996, Moll Flanders의 번역본인 듯) 밖에 못 찾았음.
Ø 참고할 작품, 자료
몽테뉴 <수상록>: 종교에 대한 관용 부분
<캉디드>의 서술 속도에 관하여
<캉디드>가 독자에게 주는 기쁨은 무엇보다 그
속도와 리듬에 있다. 매 페이지마다 상상 가능한 각종 불행이 숨 가쁘게 쏟아져 나오고, 맥락 없이 등장하는(심지어
아까 죽었는데 아무 설명 없이 다시 나타나 걸어 다니는 인물도 있다) 많은
인물들이 기회만 주어지면 엎친 데 덮치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후려쳤던 재앙들을 줄줄 읊어댄다. 세계는
카오스 그 자체. 낙천주의자 팡글로스와 결국은 악이 승리할 것이라 믿는 마르탱과 함께 이 세계를 여행하는
캉디드는 불행이 끝나는 유일한 곳인 앨도라도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은 안데스 산맥의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제 어찌할까? 악이 이기게 되어 있든 선이
이기게 되어 있든 신이 우주를 만들거나 만들지 않았든, 인간은 알 도리가 없다. 이 어설픈 세 여행자처럼 인간은 삶의 갖가지 고통과 위험에 맞서 버티고 또 싸울 뿐이다. 희망이 있다면 아무리 기관총처럼 발사되는 불행이라 해도 그 끝은 있다는 것이다(죽음). 이를
종합하는 볼테르의 입장은 이슬람교도 노인의 입을 통해 한 문장으로 전달된다: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 그는 종교적 형이상학의 세계에 맞서는 의지적 자세와 실천적 노동의 윤리를 옹호하였던 것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캉디드>: 여러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출판되었음.
Ø 국내에 번역된 볼테르의 작품
<철학편지>, 이병애역, 동문선,
2014
<자디그, 또는 운명>, 이효숙역, 연대출판부, 2011
<관용론>, 송기형 외 역, 한기사,
2001
"자유롭게 읽는 그때에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15)
"디드로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독창성이라기보다는 그 작품이 다른 책에 대해 차례대로 답하고 논쟁하며 그 책들을 완성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작가가 쏟은 모든 노력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은 그것이 놓여 있는 전체적인 문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로운 태도, 시종일관 발휘되는 유머 기질, 곡예처럼 이어지는 글쓰기로 규정되는 스턴의 위대한 재능은 디드로뿐 아니라, 낭만주의적인 아이러니로 이어지는 세계문학 전체에 전수되었다." (165)
"당시의 베네치아는 그러니까 카를로 골도니의 작품에서 바로 뛰어나온 듯한 요지경 속 인물들 모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무대였다. 산수 계산에 푹 빠져 있던 염세적인 수도승 오르테스는, 초상화에서 차분한 자태로 앉아, 머리엔 가발을 쓰고, 뾰족한 턱에 약간은 삐딱한 웃음을 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자기가 보기에는 너무나 간단한 것을 전혀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온통 주변을 둘러싸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럼에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남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류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모습, 그러다 마침내는 광장 저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사라져 가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174)
"<연애론>을 읽기에 앞서 우리는 스탕달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대상을 분류하고 목록화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스탕달의 정신세계는 체계적인 정신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 스스로 가장 정돈된 저작이 되기를 희망했던 책에서조차 그는 체계적인 정신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있었다. 그가 지킨 엄격함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이 ‘결정 작용’이라 부른 기본 개념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로부터 '행복’, ‘아름다움’과 의미론적으로 가까운 영역뿐만 아니라 사랑의 명명법 아래 확장될 수 있는 의미 범위 전반을 탐색하게 된다." (182)
"아무리 훌륭한 사냥개라도 사냥꾼의 총성이 울려야만 사냥감을 물어올 수 있다. 사냥꾼이 총을 쏘지 않으면 사냥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소설가는 주인공의 사냥개와도 같다." (192)
"스탕달이 옹호한 가치는 자신의 특수한 본질(과 한계)을, 주변 환경의 특수한 본질 및 한계와 비교하는 데서 나오는 존재론적인 긴장에 있다. 존재는 정확히 엔트로피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미립자처럼 어떠한 형태나 연결도 없는 순간과 충동으로 소멸하고 만다. 스탕달은 개개인이 각자 에너지보존법칙 혹은 지속적인 에너지 재생의 과정을 따라 자신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결국 어느 경우에든 엔트로피가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결국 우주에 은하수들과 함께 남는 것은 허공을 떠도는 원자들의 소용돌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수록, 이러한 자기실현은 더더욱 엄격한 하나의 명령으로 주어진다." (197-8)
"어떠한 텍스트를 주어도 그는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그 이야기를 가지고 놀 것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문학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는 텍스트여야만 한다. 이를테면 셔먼 장군 앞으로 온 고기 통조림 공급 상황 보고 문서, 네바다의 한 상원의원이 그의 투표자들에게 답하는 편지, 테네시 주 신문에 실린 논쟁, 주마다 실리는 농업 관련 기사, 번개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독일어 판 안내서, 심지어 소득세 신고에 관한 문서처럼 문학 외적인 텍스트들 말이다." (238)
"오늘날 진정으로 현대적인 서사는 우리가 사는 시간이 (그 시간이 무엇이건 간에) 결정적이고도 무한히 중요한 순간임을 보여 줄 때에만 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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