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 사라져버린 경우라 하더라도 그 사연과 과정이 깊이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사상사는 쓰여져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알지는 못해도 그림자라도 흘끗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또 알겠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도 안정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해 최소한의 식견과 철학을 갖추지 못한 국민들은 대중 선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그 정치적 사회적 판단은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옅은 사회는 안정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18-9)
또한 신소설 작품들, 대표적으로 이인직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배경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근거로 이인직은 당시 이완용의 개인 비서로 활약하며 한일병합 준비 작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던 골수 친일파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이는 학술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인직이 의도적으로 당시 대한제국을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그려 놓았다는 것으로써, 이는 예술 자체를 부정하는 망언이다. 우리 '국학계'는 '친일파'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인종주의자들이었다. 친일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친일'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을 운명을 타고난 괴물로 취급되었고 독자들은 이런 난센스를 묵인해왔다.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인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73)
그런가 하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사람들은 우선 자기 자신에 집중해야 했고 그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결코 따라하지 않고, 에고를 만들고 목숨을 걸고 지키기 위해 외롭게 싸워야 했다. 최병도와 같은 그런 삶이 긴 세월 동안 지속된 경우에는 '독불장군'의 비사회적 인물, 나아가서 반사회적 인물이 되어갔다. 그들은 인간들이 함께 사는 '사회', '공동체'라는 것을 거의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세대였다. 그들에게 공동체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신화에 불과했다. 최병도라는 인물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서, 에고 과대증과 같은 괴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인물의 문제는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능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의 심각한 문제였다. (132)
그들[일진회를 말함]의 핵심부는 복수를 원하는 동학 잔당이었고, 목표는 일본의 정복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협회가 개발한 연설회, 시위운동과 여러 구경거리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우찌다 료헤이를 비롯한 일본의 흑룡회 간부들이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을 도와줄 세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서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반복해야 했다. (151)
저항민족주의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뿐만 아니라 '친일파'들, 즉 민족을 팔아먹는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가 일차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상적으로는 무엇보다 교육뿐만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개화민족주의자들이 당시 조선의 자연상태의 해결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면, 저항민족주의자들은 그 해결책으로 일본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안을 제시한 친일적 사회계약주의자들 그리고 일본에 대한 투쟁을 민족주의의 근본적인 노선으로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3.1운동 이후 두 민족주의 노선이 갈등하기 시작했을 때 그 차이는 바로 이 시대에 이렇게 비롯된 것이었다. (159)
이형식이 진지하게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발전을 통해 조선 사회에서 자기 존재의 지위 확보하는 것이었다. ... 작품은 언뜻 사랑을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형식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그 문턱에서 "이상한 불길"을 이용하여 자신을 성장시켜 나갔을 뿐이다. ... 형식은 공식적으로 선형과 미국 유학을 선택했을 때 부끄러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형식은 불쌍한 조선 백성들의 환호와 자기 마음속에 불타는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지도자이자 선생의 지위를 확인함으로써 열등감을 극복하고 짜릿함을 느꼈다. 형식은 민족의 선생이 되고 그와 처녀들과 신지식인들은 조선의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 밑바닥의 숨김없는 의미였다. 이형식은 구세주 '예수님'이 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 선생님, 즉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민족을 구할 지도자가 되기 위해 낯 뜨거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개화민족주의자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이었을 것이다. (241-2)
구한말 동학 잔당을 중심으로 1백만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진회에 가담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일진회를 해산시켜 버렸고,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셨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천도교에 합류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이들은 3.1운동에 참가하며 비로소 피눈물로 참회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조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너무나 힘든 삶 때문에 조선을 원망하여 다른 임금을 모시려 했던 반역이 또 다시 일제에 의해 배신당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뿌리와 조상에 대한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자 북받쳐오는 감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그 심층에서 우리 민족의 대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임을 '만세'로 고백하고, 피눈물로 회개하고, '한 민족'됨을 뼛속 깊이 느꼈다. (262)
그러나 김동인은 1920년대를 거치며 강한 인간은 신식 교육을 받고, 합리적으로 살고, 고백체로 잘 묘사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개회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 단적으로 근대 문학의 기법인 고백체는 약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들을 약하게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기술이었다. ... 김동인은 기독교도로서 사랑을 좌우명으로 살고자 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시대에 사랑으로--어떤 사랑이라도--강한 인간이 되는 이야기는 제대로 써내지 못했다. 사랑을 어디다 쓸지 별로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였다. 나아가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가 우리 문학사에서 이룩한 업적의 결과인 내면을 장착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한 자들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약한 자들이 왜 약한 자가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안성맞춤의 장치가 바로 내면이었다. (319)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비결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가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 심훈은 최초로 이를 간파한 천재였고 <상록수>에서 멋지게 활용하여 불멸의 전사들을 민족 운동의 전선에 바로 배치하였다. ... 소설에서 사랑은 점점 더 가혹한 시련의 과정으로 변해갔고 그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과 마음가짐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 극단적인 예가 이광수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고행 그 자체로 연결되었고 작품은 더욱 더 엽기적으로, 자학적으로 변해 갔다. (427)
우리 근대사를 보면, 합일병합을 당할 시점의 우리 민족의 모습과 해방을 맞이했을 때 우리 민족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해방을 맞이한 그때, 우리 민족 대부분은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폭력도 테러도 어떤 수단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싸움은 대부분 오리끼리의 싸움으로 이어졌고 한국 전쟁 때도 그러한 생존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30년대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힘든 시기였지만 그들이 새롭게 매진한 창조의 길은 새로운 민족의 지평을 만들고 있었다. (430)
우리 근대사에서 강한 한국인이 나타나는 거대하고 심오한 문화적 전환은 그때 당시에는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문화 변동의 깊은 층위를 조사하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물론 일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노예 상태에 처해 있던 우리가, 은밀히, 우리끼리 만들어 온 것이었다. 그들의 폭력에 끝까지 견디고 언젠가는 복수하고 말겠다는 원한을 쌓아갔으며, 그러한 복수의 의지는 우리를 강하고 독하게 만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춘원의 공로는 지대한 것이었다. 사랑은 핵심의 무공이었다. 그의 수많은 성격적 결함과 과실에도 불구하고 춘원은 스스로 자처해온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의무와 역할은 충실히, 성공적으로 수행하고야 말았다. (431)
... 하여튼 임꺽정은 근대에, 특히 일제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종류의 영웅이었다. 특히 이 소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중대한 요인으로 작동해온 '민중'을 말뿐이 아니라 피와 육신을 갖춘 살아 있는 영혼으로 창조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임꺽정이 표출하는 반지성주의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쳐 왔다. 식민주의의 유산으로서의 반지성주의는 우리나라를 정체성이 취약한 나라로 몰아왔다. 반지성주의는 우리나라를 생각 없는 짐승들의 세상으로 만드는 한편, 외국, 선진국의 학문과 사상에 기대어 살겠다는 지적 의존의 나쁜 습관을 심화시켜 왔다. (436)
주지하듯이 이 소설의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는 그간 잃었던 우리말, 특히 민중의 말을 상당히 되찾았다는 점이다. 조선 사람, 특히 민중의 일상 대화에서 따뜻함과 유머 감각을 현실감 있게 되살리는 데 벽초가 유별난 관심을 보인 것은 임꺽정이라는 영웅을 내려 보내며 지상의 현실에 적응시키고 뿌리박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고유한 조선인의 언어와 생활 풍습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벽초는 '양취 나는' 서양식 사실주의 기법, 예를 들어 고독한 주인공과 고백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속마음을 그의 고백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나누는 격의 없는 대화, 농담, 욕지거리 등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벽초 특유의 주체성을 형성해 간 것이다. 벽초가 보여주는 주체성이란 개인에만 속한 곳일 수 없다. 주인공 영웅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주체적이어야 했다. (447)
...'민중'이라는 말은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을 거쳐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온 말이었다. ...... 그에[인민을 말함] 반하여 '민중'은 서양의 어떤 정치 언어의 번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근대 서구 사상과 정치 언어들이 도입되어 널리 사용도히는 가운데 한자권인 동북아 삼국 간에 독창적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온 말이었다. 말하자면 '민중'은 동양의 전통문화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고 서구 정치 언어의 번역어도 아니었다. 오히려 동북아 삼국의 지식인들이 근대에 창의적으로 만든 말이었고, 적어도 한국에서는 대성공이었다. (485)
단재가 언어로 '민중'이라는 말의 뜻을 명쾌하게 부각시켰다면 벽초는 이 말에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입혀 우리의 눈앞에 '민중'의 영혼을 창조하였다. 사회의 밑바닥에 태어난 천상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지식인들 및 외부 계급의 지원이나 간섭을 배제하며 싸워나갔다는 이 이야기는 ...... 우리는 '민중'의 경우에 논리를 따지는 사상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영혼을 창조하는 예술을 통해 표현된 사상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임꺽정>이 보여주는 이러한 민중의 존재가 설득력을 얻었던 것은 전통적으로 한국 문화에서 '민중' 즉 가난한 농부들, 천민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온 경험이 '민중'이라는 말과 인간상의 현실감을 높여주었기 대문인지도 모른다. ... 그리고 이 민중 영웅은 근대 서구인으로서의 변신술로 엄청난 생존력과 번식력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는 민중 영웅은 한국에서와 같은 변신술을 얻을 수 없었다. (496)
말하자면 반지성주의는 동학과 3.1운동 등 '민중의 등장'에서 영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민중 자신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반지성주의는 민중의 목소리가 아니라 민중을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즉 민중의 맞은편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499) ...... 말하자면 <임꺽정>이 드러내는 노골적인 반지성주의는 작가가 그러한 사상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제시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조선 사회 어디에나 퍼져 있던 생각을 전달하고 있음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상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사상이 아니라 남몰래 은근히 자신의 '다른 자아'에게 강요하는 격률인 것이다. (506)
그러나 한편 임꺽정의 반지성주의는 현대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점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기적으로 임꺽정 신화는 나르시시즘에 전염되어 임꺽정을 자신과 혼동하는 정치 '스타'들을 대량으로 양산해왔다. 지식과 지성을 경멸하며 타고난 능력과 직접 경험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독불장군 유형의 정치 영웅들은 우리 현대 정치인들 사이에서 우성의 종자로 번식해왔다.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는 허세를 부리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저항의 '스타'들은 우리 정치를 문자 그대로 '아수라'판으로 만들어 왔다. ... 이런 문제들은 우리의 '저항민족주의'의 관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이 그간 임꺽정 신화의 의미를 정확히 해독해내지 못한 채 탐독했기에 더욱 악화되었는지 모른다. ... 반지성주의는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의혹과 증오와 질투를 토앻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장애가 되어 왔고 나아가서 개화주의자들의 '교육만능주의'와 단짝으로 결합되어 대한민국을 청소년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교육 지옥'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517)
나아가서 강한 조선인을 찾아 온 지식인들의 노력은 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는 선택의 핵심은 1920년대 춘원이 제안했던 도덕성 회복을 통한'민족 개조' 계획을 기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 선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홉스적 자연상태'의 상처가 생생한 상황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제쳐놓고 강한 조선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결코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도덕성의 문제는 한국인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조우하게 될 문제였다. 해방된 한국인들은 너무나 거칠었고 '힘'에 대한 박탈감에서 '힘'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30년대 춘원을 위시한 조선 지식인들이 이룩한 '강한 조선인' 추구의 대가였을 것이다. (5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