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내렸는지 들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고와서 거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강물과 강물에서 번져나간 것만 같은 모래밭과 거의 평볌으로 펼쳐진 숲, 그리고 뗏목들, 머지않아 겨울이 오고 강물이 얼어버리면 뗏목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열띤 송잔환 은성을 바람 소리처럼 이제는 무심하게 들으며, 술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길상의 가슴에 돌연 뜨거운 것이 치민다. 불덩이 같은 슬픔이,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눈물 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슬픈가. - P19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 P19
"뭐니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아니겄어? 부모 자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린 배 채우는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 P33
‘살갗의 구멍 하나하나를 곧추세우고 있었구나. 수풀 속에 웅크린 맹수 터럭같이 말이다. 마치 흡반...처럼 주변의 안팎을 모조리 흡수한다. 저놈의 살갗은 어떤 자리 어떤 군중 속에서도 적과 동지를 가려낼 것이다. 시종 눈을 내리깔고 있구나. 저놈의 귀는 무엇을 듣고 있는고? 필경 멀리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위험과 안전을 가려내고 있겠지.‘ - P61
‘분명 이자는 지도자다운 꼴은 아닌데...... 어둠과 침묵 속에 묻힌 인물, 그러나 혼자서도 무슨 일을 해치울 것 같다. 기적을 이룰 것 같다.‘ - P62
"신발이란." 담뱃대를 빨고, "발에 맞아야 하고," 담뱃대를 빨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담뱃대를 빨고, - P77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쟁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야. ...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든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 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 P119
"그 문의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었소. 가난한 백성들은 영신환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정성 들여서 먹고, 그 한 알의 영신환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배부른 사람들은 천하 명약도 정으로 받지는 아니한다고요. 초봄 들판에서 나물을 캐는 고사리 같은 손은 정에다 정을 돌려줄 줄 알지만 시공창에 흰밥 쏟아 버리는 아낙은 허기 든 사람에게 식은 죽 한 그릇 베풀 줄 모른다구요." - P207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향한 길을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해주는 것, 석이는 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가 내리눌리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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