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시간 말인데.> 요아힘은 이렇게 말하고, 사촌의 분개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여러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는 친구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넌 아무래도 믿지 않겠지만 말이야. 3주란 이들에겐 하루와 같은 거야.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거라고.> 이렇게 말하고 그는 덧붙였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개념도 변해 버려.> (21)
우리는 우리 존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보편적이고 비개인적인 토대를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대해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그러한 토대에 결함이 있을 경우 자신의 정신적 건강이 이로 인해 막연히 침해받는다고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은 여러 가지 개인적인 목표와 목적, 희망과 전망이 눈앞에 떠다니고 있어 이러한 것들 때문에 더욱 노력하고 행동으로 몰고 가겠다는 원동력을 얻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주위의 비개인적인 것, 즉 시대 그 자체가 외견상 매우 활기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희망이나 전망이 걸여되어 있다면, 또 시대가 우리에게 희망도 없고 전망도 없으며 해결책도 없다는 것을 남몰래 인식시켜 주고, ... 시대에 대한 어떤 형태의 질문 ...--즉 우리의 모든 노력과 활동이 지닌, 개인적인 의미 이상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한 공허한 침묵을 계속 지키고 있다면, 그러한 사태로 인한 모종의 마비 작용을 보다 솔직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의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비 작용은 ... 육체적이고 유기체적인 부분으로 파급될지 모른다. (68)
<저런, 그럼 당신은 우리와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아프지 않고 건강한데, 이곳에는 단지 청강생으로 오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지옥을 찾아간 오디세우스처럼 말입니다. 참 대담도 하시군요. 죽은 자들이 취생몽사...하는 이곳 심연으로 내려오시다니요.> <심연이라고요, 세템브리니 씨? 아니 무슨 농담을요! 난 당신들이 사는 이곳으로 5천 피트 정도 올라왔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느껴질 뿐이지요! 단연코 그건 착각입니다.> (115)
그 순간 그는 갑자기 2~3일 전 밤에 꾸었던 꿈이자, 최근에 받은 인상을 모델로 한 꿈의 원형인 옛날의 한 장면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 꿈은 너무나 생생하고 철저하며, 또 시간과 공간이 소멸해 버릴 정도였기 때문에,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시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위의 시냇물 옆 벤치에 누워 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육체에 불과하고, 진짜 카스토르프는 먼 과거의 시간과 환경 속에, 그것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모험에 넘치고 심장을 흥분하게 하는 그 옛날의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232)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눈 자체가 문제였다. 가느다랗고 더없이 매혹적인... 키르키스인의 눈, 먼 산의 회색이 섞인 푸른빛 혹은 푸른빛이 섞인 회색을 띠고 있는 눈은, 가끔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닌 곁눈질을 할 때면, 눅아내리듯 베일에 싸인 캄캄한 색으로 완전히 흐려지는 것이었다--클라브디아의 눈, ...그 눈은 위치나 색깔, 표정에 있어서 프리비슬라프 히페의 눈과 깜짝 놀랄 정도로 닮았던 것이다! <닮았다>라는 말은 결코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그것은 꼭 같은 눈이었다. ...--이 모든 것이 프리비슬라프와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프리비슬라프도 학교 교정에서 그의 옆을 지나갈 때면 이와 똑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던가.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프리비슬라프가 이 위에서 쇼샤 부인의 모습으로 다시 눈앞에 나타나 키르키스인의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았다는 것도 자신이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행복한 의미에서건 불행한 의미에서건 피할 수 없는--어떤 운명에 지배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284)
북쪽의 할아버지와 남쪽의 할아버지, 이 두 분은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 그 목적은 자신과 타락한 현재 사이에 엄격하게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쪽 할아버지는 자신의 본질에 속하는 과거와 죽음을 위해 경건한 심정에서 검은 옷을 입었으며, 이에 반해 다른 할아버지는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에서 경건과는 적대적인 진보를 위해 입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이 두 분은 두 개의 세계이거나 방위라고 할 수 있다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생각했다. 그리고 세템브리니가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이 마치 이 두 세계의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두 세계를 꼼꼼히 살피면서 한번은 이쪽 세계를 바라보다가, 한번은 저쪽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300)
아름답게 쓴다는 것은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이나 거의 진배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것까지도 그리 멀지 않다. 모든 순화와 윤리적 완성은 문학의 정신에서, 인간 존중이라는 이러한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인문성과 정치의 정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이며, 동일한 힘, 동일한 이념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할 수 있다. 어떤 이름으로 말인가? 이 이름은 친숙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사촌들은 확실히 그 음절의 의미와 위엄을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그 이름은 바로 문명이다! (309)
그렇다면 애국심, 인간의 존엄성, 아름다운 문학과는 다른 방향, 이와 반대되는 방향에는 무엇이, 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축 늘어지고, 벌레가 갉아 먹은 듯 침식되어 있고, 키르키스인의 눈을 한 클라브디아 쇼샤가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니... 그는 다시 홀슈타인의 호수에서 작은 배를 타고 서쪽 강가의 유리같이 밝은 낙조의 빛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눈부시고 현혹된 눈으로 동쪽 하늘의 안개에 싸인 밤의 달빛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311)
세템브리니는 허리를 구부렸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상세하게 설명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번 죽음과 가깝게 접촉한 사람은 무분별한 세상 사람들의 냉혹하고 거친 행동에 대해, 다시 말해 이들의 냉소적 태도에 대해, 감정이 상하여 화가 나고 예민해진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겁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진심으로 감격하며 외쳤다. <너무도 정확히 완전무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세템브리니 씨! 죽음과의 접촉이라!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문학가로서.......> (389)
내가 당신의 직업을 알마나 찬미하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직업이지 정신적인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나와는 달리 저 아래 세상에서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평지에서만 유럽인이 될 수 있으며, 당신 자신의 방식으로 고통을 적극적으로 타파하고, 진보를 촉진하며, 시간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부과된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에게 이것을 상기시키고, 당신이 정신을 차리도록 하고, 당신의 개념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거듭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당신의 이미지에 신경을 쓰십시오! 자부심을 가지고, 낯선 이 세계에 빠져들지 마세요! 이러한 진흙탕 구덩이, 마녀 키르케의 섬에서 벗어나 주십시오. 당신이 오디세우스가 아닌 이상 이곳에서 무사히 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네 발로 기어다니게 될 것입니다. 벌써 당신의 두 앞발이 땅에 붙으려고 합니다. 이제 당신은 금방 꿀꿀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주의하십시오.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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