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이 번호가 있는지 직접 확인했다. 소문에 의하면 연녹색 잉크로 손목에 숫자를 새기는데 지워지지 않도록 바늘로 찔러서 문신을 한다고 했다. 그 무렵 수프를 가져온 봉사자들의 대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들도 번호를 봤는데 부엌에서 일하는 온 지 오래된 죄수들의 피부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우리 중 한 명이 "그게 뭐요?"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사람들이 그 의미에 대해 점점 곰곰이 생각하거나 주변에서 자주 언급하곤 했다. "Himmlishe Telephonnummer." 그 죄수가 독일어로 이렇게 대답했는데 그 의미인즉 `하늘의 전화번호`였다. (118)
"이디시어 할 줄 알아?" ... "넌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잖아." 그들은 고개를 저였다. 소위 사업 세계에서는 능수능란하다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이익보다 손해와 손실이 훨씬 많은 이런 일에 어리석게 집착하는 걸 보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헝가리에서도 느낀 당혹감과 같은 근질근질한 미숙함을 그들 틈바구니에서 간혹 느꼈는데 그것은 내가 완전히 정상적이지 않고 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가 유대인 같다는 느낌이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그것도 유대인 사이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153)
장중한 말 한마디나 제스처, 여기저기에 보내는 반짝이는 눈빛 하나까지 모두 하나의 빛이다. 최소한 나라도 이런 것들을 더 유용하게 사용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유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개인적으로 서로에게 화가 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실 수용소에서도 우리에게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드러내지 않고 남들에게 하는 상냥하고 분별 있는 사소한 말이 결국 본인에게 더 많은 것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8)
그런데 나는 집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일종의 겸손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나는 바르게 살지 못했고 집에서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으며 후회할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음식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일부만 골라 먹고 나머지는 옆으로 밀어 둔 일들이 생각났다. ... 또 인간적으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쓸데없이 줄다리기를 했던 일 역시 후회되었다. 나는 `나중에 집으로 돌아간다면` 하고 생각했다. ... 그래서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내고 화해를 이끌어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70)
도저히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많은 노력과 부질없는 시도 끝에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 추위나 습기, 바람이나 비도 나를 막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느낌조차 없었다. 배고픔마저 사라져 버렸다.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재미 삼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일할 때? 물론 일할 때도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두들겨 팼지만 그래 봐야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나로서는 오히려 시간을 벌 뿐이었다. 나는 한 대 맞으면 바로 땅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금세 잠이 들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187)
아무튼 그때까지는 내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거의 믿을 수 없었더 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자주 듣곤 했던 `시체`라는 표현을 그때까지는 죽은 사람에게만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고 완전히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몸이 그곳에 있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덜컹거리는 열차 바닥의 차갑고 사방이 의심쩍은 액체로 축축한 짚 위에 내 몸이 눞혀져 있고 내 옆과 그 위에도 비슷한 물체가 눕혀져 있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이 나에게 가까이 와 닿지 않고 관심도 가지 않을 뿐더러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이미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이 가볍고 평화로웠는데 솔직히 말해 나는 마치 백일몽에 빠진 듯 정말 평안한 느낌이었다. (200)
한마디로 여기서는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 예측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진심이었고 우리의 미래와 관련된 좀 더 현실적인 다른 희망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바람이 내 마음속에 가득했다. 이때 나는 허영심이라는 감정이 최후의 순간까지 사람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내 가슴을 후벼 파서 어떤 질문이나 요구,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3)
공기 중에 멀리 퍼져 있는 떨떠름한 냄새로 보아 순무 수프임에 틀림없었다. 이 광경과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미 굳은 가슴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신중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205)
내가 어떻게 그렇게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는 원래 헝가리 북부 지방에 있는 펠비데크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헝가리인들을 피해, 그의 말을 빌리면 "헝가리인들의 점령"을 피해 가족들이 친척과 지인들과 함께 단체로 그곳에서 도망쳤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헝가리에 있었을 때 펠비데크가 다시 헝가리 땅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국기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하루 종일 기쁨의 축제를 열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내가 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테레진`이라는 지역에서 강제 수용소로 오게 됐다고 했다. 그가 내게 틀림없이 테레지엔슈타트를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곳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체펠 섬에 있는 세관 건물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 매우 놀라워했다. "그건 프라하에 있는 게토야." (239)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만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 결국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일종의 고집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아무튼 그것은 정말 완벽하고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가장 성공적이고 특히 나에게 있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유용한 고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242)
"우선 그 끔찍했던 일들을 다 잊어야 한다." 내가 좀 놀라며 물었다. "왜 그래야 하죠?" ... "그래야 네가 살아갈 수 있거든." ... "그런 짐을 지고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단다." 나 역시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일리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나에게 그런 불가능한 일을 요구할 수 있는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인데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 내가 말을 계속했다. "특히 저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278)
나 역시 점점 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왔다. 나 역시 비르케나우뿐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나의 걸음을 걸어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걷고 어머니와 함께 걷고 언너마리어와 함께 걸어왔다. 그런데 가장 힘든 걸음을 위층에 사는 자매의 언니와 걸었던 것 같다. 이제는 `유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 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냈다. 그들이 왜 내가 지금 그것을 품고 출발해 어딘가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착오이고 우연이고 일종의 탈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281)
푸른 언덕 위를 지나가는 양털구름은 보랏빛을 띠고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이 뭔가 좀 바뀐 듯했다. 교통량이 줄어들고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느려졌으며 목소리가 나지막해지고 시선도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이 시간대는 수용소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에서도 그 느낌이 전해졌다. 뭔가 섬세하고 고통스럽고 허무한 느낌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향수였다. ... 그렇다. 어찌 보면 그곳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수용소에서의 모든 일이 다시 떠올랐다. 또 그곳에서는 별로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과 나의 관념과 실존 속에서만 존재를 증명해 주는 번디 치트롬, 피에트하, 보후시, 의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약간의 원망 어린 마음과 애정 어린 반감으로 그들을 떠올려 보았다. (284)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수없이 비바람을 맞아 왔지만 여전히 수천 가지 기대로 충만한 거리들을 둘러보며 내 안에서 하나의 각오가 생겨나더니 그것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 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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