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의 치우침&공백이 있으나 공식적-대중적 역사 기억의 좋은 보충제가 되는 책. 장제스의 ‘고난‘에 대해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고 태어날 때부터 친일판 줄 알았던 왕징웨이의 마음의 궤적도 이해하게 됨, 심지어 중국을 분노와 복수의 대상으로 봤던 당시의 일본군&대중의 심리기제마저도. 착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에 엄청난 역경을 감당했던 정부와 중국 민중의 영웅적인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최후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국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되풀이하여 말했던 기자와 외교관들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증명했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 기간에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세계에서 군사화가 가장 진전되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일본군 80여 만 명을 묶어두었다. 그 뒤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던 연합국의 승리에는 중국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 P14

연합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장제스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연합국의 전략적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자신들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하도록 거듭 강요당했다. 1945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국민당 정권이 절뚝거리며 동정받지 못하는 불구가 된 이유는 맹목적인 반공과 항일의 포기(...4년 반 동안 홀로 일본에 맞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억지다) 또는 멍청하거나 원시적인 군사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국내 혼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었다. - P22

"우리는 기발한 물건 따위에 관심이 없다 너희가 만든 상품은 우리에게 조금도 필요 없는 것들이다." - P28

왕징웨이는 대부분의 중국 민족주의자처럼 모든 외세 제국주의를 적대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중국 영토에 식민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과의 동맹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최소한 일본은 중국과 문화적인 유대감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하는... 불행한 위치에 있었고 대중이 보기에 그는 비할 바 없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미움 받는 대상이 되었다. - P74

전쟁 내내 장제스는 쑨원에 의해 상징적인 된 1911년 혁명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정신과 종교적 신념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통해 전쟁이 새로운 중국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여러 차례 선언했다. 전쟁의 가장 어두운 시간 동안 끝없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일본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 P107

잔학 행위는 왜 일어났는가? 처음부터 난징 주민들을 대량 절멸시킬 음모가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냉정한 계산이 아니라 약탈과 살인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비록 난징은 가장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일 군이 중국 동부를 침략하면서 자행한 수많은 잔학 행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군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쉽게 정복할 것이며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에 겪었던 것처럼 약간의 저항에 부딪히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저항의 강력함,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일본에서 야수처럼 훈련받았고 정당한 전쟁이라는 선전에 세뇌당한 일본군 병사들이 자제심을 잃게 만들었다. ...... 외부의 눈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 또한 만행이 저질러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이었다. - P171

어쩌면 장제스는 그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 달 동안 난징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P173

전쟁 첫해와 같은 격렬한 전투는 줄어들었다. ... 변화의 중심에는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발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가가 인민의 일상적인 복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전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가가 인민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만큼 인민 또한 국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햤다. - P206

정부는 피란민들의 처우가 공산당이나 일본과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중산층, 특히 진보 성향의 사람들에게 확실한 대안은 공산당이었다. 가난한 농촌 출신 피란민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향 땅에서 살 수 있었다. ... 그렇다보니 국민정부는 피란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적인 자긍심 문제를 넘어 이들이 ‘자유중국‘의 현실을 알릴 수 있엇기 때문이었다. - P215

저우포하이와 그의 보스였던 왕징웨이는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가장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중국이 파괴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소련에 의해 공산 중국이 세워질 것인가 두 가지 미래에 직면한 왕징웨이 일행은 평화 협상만이 전란에서 중국을 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기보다는 소위 대아시아주의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순수한 이념적 열정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열강들의 형태는 그들에게 일본을 보다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일본의 생활 방식을 동경한 열렬한 부역자라는 의미의 ‘친칠‘은 결코 아니었다. - P250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민주주의"를 거론했지만 이들이 말하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일당 통치 아래에서 대중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두 사람만이 그렇게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인도 민족주의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 버마의 바모... 같은 반 서구 혁명가들 또한 대부분 진보적 대중적이면서도 동시에 다원적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점에서 의회 민주주의 모델을 추구했던 간디와 네루는 이 지역을 통틀어 그야말로 이례적인 사례였다. - P278

장제스는 새벽 1시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루스벨트에게 응원의 편지를 쓰면서 새로운 "공동의 전쟁"에 헌신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식은 상하이의 저우포하이에게도 전해졌다. ... "나는 일본군이 호놀룰루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홍콩을 폭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또한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부터 태평양은 도살장이 되리라." - P285

문제는 중국과 서구가 서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구 연합국들이 보기에 중국은 일본군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미국이나 영국이 나타나 자신들을 만행으로부터 가해주기만 무릎 꿇고 간절히 기다리는 애처로운 나라였따. 반면, 장제스와 대다수 중국인의 생각은 자신들이야말로 추축국의 침략에 맞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워온 맞수였다.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수없이 있었지만 중국은 외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로인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과 동등한 열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 P295

연합국은 장제스가 동맹국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허구를 강요함으로써 미중 관계를 갉아먹었다. 가치가 의심스러운 버마를 되찾으려고 계속 시도하기보다는, 장제스가 제한된 자원을 중국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 P434

냉정하게 말하면, 종전 직후 국민당 치하에서 만들어진 진정한 성취가 있었지만, 국내보다는 국제무대 쪽이었다. 중국의 전시 기여는 새로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로 규정되면서 다른 나라들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는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또한 그 밖의 모든 새로운 국제기구 내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1945년까지도 여전히 세계 문제에 있어서 완전하고 동등한 주권을 가진 비서구 국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영국과 프랑스는 인도가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그들 제국의 많은 부분을 유지했다.) 중국의 지위는 국가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며 1937년 전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 식민국가이자 납작 엎드린 채 와해 직전이었던 모습과는 깜짝 놀랄 만큼 대조를 이루었다. - P468

국민달과 공산당 모두 그들이 결코 추구하지 않았던 운명과 싸워야 했다. 그들의 고통과 저항, 그들이 강요당한 끔찍한 선택들을 인정하면서 서구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집단기억을 가다듬어야 한다. - P4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2040 베트남의 정해진 미래 - 인구학과 경제학이 알려주는 베트남의 기회와 위험
조영태.쩐 민 뚜언.응우옌 쑤언 중 지음 / 북스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이 갇혀 있는 여러 편협한 틀(예: ‘인구정책=가족계획‘ 등)에 애당초 빠진 적 없이 한국이 안 가본 길을 이미 걷고 있는 베트남을 알게 됨. 베트남의 정치구조가 외려 강점이고 ‘배움은 평생‘이라는 밈이 전계층에 걸쳐 작동하는 곳. ‘인구‘라는 툴이 얼마나 입체적으로 쓰일 수 있나도 알게 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2040 베트남의 정해진 미래 - 인구학과 경제학이 알려주는 베트남의 기회와 위험
조영태.쩐 민 뚜언.응우옌 쑤언 중 지음 / 북스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데 ‘넥스트 차이나...‘라 여겨지는 베트남에 대해 다방면에서 조명한 참고서 같은 책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6

사람이 나이 들수록 젊은 사람들의 손길이나 생각이 필요할 수밖에 없듯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고령화될수록 주변에 젊은 국가들이 있어야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도 15년 앞서 고령화를 맞이한 일본은 당시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젊은 국가 한국과 대만이 있었기에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성장이 가능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 P41

또 하나 특징은 중앙의 산간지역을 제외하고는 인구가 5개 지역에 비교적 골고루 분포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도시집중 및 농촌 공동화 현상을 떠올리면 부러워지는 부분이다. 베트남 정부는 각 지역의 인구 균형이 앞으로도 유지되기를 희망하며 정책을 펼치고 있다. - P56

인구국이 가족계획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까?
우리는 흔히 인구정책이라 하면 가족계획을 떠올린다. 그것 말고 어떤 인구정책이 있을지 말해보라면 다들 멈칫한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인구정책이라곤 가족계획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P61

우리나라는 1996년까지 가족계획을 실시했다. 1983년에 이미 합계출산율이 2명으로 떨어졌는데도 안이하게 정책을 이어가다 1996년에 1.57명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중단한 것이다. 그다음에는 우리나라 정부가 인구와 관련해서 무엇을 했을까?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가족계획을 하지 않더라도 인구는 계속 변동하기 때문에 정부의 누군가는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인구‘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정부조직을 다 없앴다. 왜냐하면, 가족계획이 끝났으니까.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인구문제다. 10년 가까이 손 놓고 있다가 출산율이 1.08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2005년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만들었다. - P62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출산율 자체보다는 실제로 태어나는 출생아 규모다. 설령 출산율이 크게 떨어진다 해도 전체 출생아 수만 비슷하게 유지된다면 국가의 인구구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가임기 여성의 규모가 크다는 점을 감안해 한 해 출생아가 140만 명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구구조가 우리나라처럼 피라미드형에서 다이아몬드형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 안정적인 종형 구조로 만들려는 것이다. - P66

인구오너스를 걱정하는 우리로서는 인구배당을 기대하는 베트남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손 놓고 부러워하지만 할 수는 없다. 베트남의 밝은 미래가 더 밝아지도록 우리의 역량을 투자해 미래에 돌아올 그들의 인구배당을 나눠 가질 생각을 해보자. 그러려먼 앞으로 베트남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떤 변수를 고려해야 할지 미리 파악해야 한다. - P72

200만~300만 명대 농촌지역이 베트남 곳곳에 있고, 정부도 농촌의 지역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며 농촌의 인구규모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산업화 과정에서 ‘농림부‘의 힘이 컸던 적이 없지만, 베트남은 농림부의 위상이 매우 높다. 장관은 한 명이지만 차관이 5명이나 돼, 분야별 정책을 추진하고 이슈에 대응하는 역량도 뛰어난 편이다. 그뿐 아니라 지역마다 농업대학을 설립해 운영하는데, 교육과정은 교육부가 관장하지만 학교 관리는 농림부가 직접 한다. - P101

이러한 세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베트남 사람들은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그대로 투영하면 안 된다. - P116

이것이 현재 중국과 베트남의 결정적인 차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중국에는 세계적인 대학도 많고, 해외 유학도 활발하다. 그 좋은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외국 기업에서 일을 배운 다음 고국에 돌아와 자국 기업에 취직하거나 직접 회사를 차렸다. ......
...... 그런데 베트남 유학생의 상당수는 학위를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아직까지 베트남 대학들이 이들 인재를 품을 만한 수준이 못 되기 때문이다. - P125

그런 점에서 안타까운 면이 있다. 베트남에 파견된 우리나라 기업 주재우너들은 예외 없이 하노이나 호치민 같은 대도시의 특정 지역에 몰려 한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현지인들과의 교류가 적고 아이들도 대부분 국제학교로 전학시킨다. 국제학교를 나와서 한국이든 미국이든 다른 나라로 진학한다면 모르겠지만, 베트남 사회에서 속된 말로 ‘먹어주는‘ 학교는 국제학교가 아니라 이런 전통의 명문학교인데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이들 학교에서 영어도 잘 가르치는데 말이다. - P127

베트남에서 소셜리제이션이라는 단어는 ‘민간과의 협력 강화‘, 혹은 ‘민간자원의 활용‘을 뜻한다. 반드시 민영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화‘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사뭇 놀랐다. - P133

내가 "이게 가능한 일이냐, 국가가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이게 소셜리제이션이라고 했다. 아직은 국가가 양질의 사회보장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니, 그 대신 좋은 기업을 찾아서 저렴하게 공급해주겠다는 것이다. - P135

베트남에 적용하거나 응용할 수 있는 분야가 비단 교육뿐이겠는가. ......
결론적으로 말해 베트남 기업이 언제 우리 기업의 경쟁자가 될 것인지를 물었던 질문에는 답이 없다.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베트남 기업이 더 성장해야 미래의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자. - 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69
동북아역사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지음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진짜‘ 자연을 만나고 온 청량감 장쾌함. 이런 자연에서 이렇게 생활하는 이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 신비롭기만 함. 그들의 사라짐에 대한 단순 탄식은 아무 소용 없고, 지금 가능한 기록 향유 소통에 집중하자. 그리고 나부터라도 울엄마의 지혜와 비법, 살아계실 때 어서 익히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