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의 삶 - 베네딕트 앤더슨 자서전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손영미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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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볼 때, ... 나는 삶에 대해 국제적이고 상대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춘기 이전에 나는 이미 윈난성...,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독립된 아일랜드, 영국에서 생활했고, 아일랜드인 아버지, 영국인 어머니, 베트남 유모 밑에서 자랐다. 가족의 (비밀)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라틴어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우리 부모님 서재에는 중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독일작가들의 책이 꽂혀 있었다. - P53

이 이미지가 담고 있는 교훈은 이 개구리가 편협하고, 촌스럽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별 이유도 없이 자만심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개구리와 달리 나는 어디 정착할 정도로 같은 곳에 오래 있어 본 적이 없다. - P53

내가 성인이 된 후 일어난 변화가 여러 면서 좋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공부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일반화되기 직전에 학교를 마친 덕분에 나는 새로운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걸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었다. - P57

내가 코넬에서 겪은 일들을 토대로 미국 내 동남아 프로그램의 심각한 문제점을 두 가지 거론하고 싶다. ...... 둘째, 1960년대에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설했지만 그들 상당수가 고용한 젊은 교수들은 코넬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코넬이 지닌 문제들이 나중에 생긴 다른 프로그램들에도 그대로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 P81

이런 이유 때문에 인도네시아는 내게 사회적 천국으로 느껴졌다. 거기서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장관, 버스 운전사, 군 장교, 웨이트리스, 학교 교사, 여장남자 매춘부, 하급 불량배, 정치가 등 거의 모든 사람과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다. 점점 부상하는 엘리트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솔직하고 흥미로운 면담 집단이라는 사실도 금세 깨달았다. - P110

‘어쩔 수 없이‘ 샘에 갔던 것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상대주의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샴에서 보는 모든 것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P137

그즈음 현장 연구의 근본적인 특징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연구 주제‘에만 매달리는 건 무익하다는 사실이었다. 연구자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눈과 귀를 단련하고,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장 연구의 장점이다. 낯선 곳에 있으면 모든 감각이 평상시보다 훨씬 더 예민해지고, 비교에 대한 욕심도 더 커진다. 현장 연구가 귀국한 후에도 그처럼 유용한 것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관찰력과 비교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유심히 보고, 늘 비교하고, 인류학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 역시 다른 나라 못지않게 아주 특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144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내가 어떤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더 이론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인을 무시하고, 수카르노를 진지하게 보지 않고 공산주의에 무조건 반대하는 무례한 미국 관료들을 만나면 짜증이 났고, 유명한 일화지만 화가 난 수카르노가 "당신들 원조 안 받을 거야!"라고 반미 발언을 했을 때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P160

이 논문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요점 두 가지 중 첫째는, 내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비교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오래 전부터 동양학자들이 즐겨 해 온 동양과 서양의 비교에 있어 나는 ... 서양인이나 다른 어느 민족 못지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 P166

둘이 같이 가르친 과목 중 정말 좋았던 것은 그때도 여전히 수하르토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인도네시아의 문호 프라무디아 아난타 투르...의 소설을 다룬 세미나였다. 뛰어난 학생들과 함께 소설을 꼼꼼히 읽는 건 내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짐 덕분에 나는 인도네시아 소설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학과 서구문학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활용해 정치학에 있어 ‘상상력‘과 ‘현실‘의 관계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 P171

마지막 표적은 바로 민족주의를 진보주의, 마르크시즘, 사회주의, 보수주의 같은 수많은 ‘-이즘‘, 즉 순전히 어떤 개념들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강력한 전통이었다. 이런 시각으로는 민족주의가 지닌 엄청난 감정적 힘,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게 만드는 그 능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 P176

그러다 보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학원생들은 본인이 고등학교나 학부 때 쓰던 글보다 훨씬 안 좋은 문체를 구사하게 되고, 대개는 은퇴할 때까지 그런 문체로 글을 쓴다. - P214

그렇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 가게에서 기다리기 하면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운은 흔히 예기치 못한 기회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기 때문에, 그런 때는 용감하게든 무모하게든 운이 달아나기 전에 얼른 붙잡아야 한다. 학자가 정말 생산적인 삶을 살려면 반드시 이런 모험심이 있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 "바람을 기다리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 P241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서 나는 스탈린 정권 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끓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아름다운 시 첫 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학생이 그 시를 따라 읊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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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오션 베트남 아직 늦지 않았다 - 베트남에서 미래를 꿈꾼다
김효성 지음 / 타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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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이례적으로 보트 피플의 이중국적을 허용하면서 지식인들이 사회적으로 많이 유입되는 상황이다. 또한 외국인 투자법인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달러가 많이 유입되고 있다. - P25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트남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은 역사가 있다. 그만큼 전쟁 승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좋은데 농담으로라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미국에게 승리했다는 그들의 자부심은 엄청나다. 베트남에서 가능하면 삼가야 할 또 다른 주제는 중국이다. - P30

한국 계좌에서 현금을 찾아 사용할 경우, EXK카드가 필요하다. EXK는 ATM에서 쉽게 인출할 수 있는데 한 번에 10~15만 원까지 인출할 수 있다. 타 동남아 국가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한국 계좌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카드다. - P54

현재 베트남 내에서는 한국의 대학 순위별 선 긋기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출신 고등학교로 차별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 P73

충돌이 가장 흔한 경우는 일반적으로 베트남인들이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할 때도 웃음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한국인 관리자들은 이것을 비웃음으로 오해하고 쉽게 흥분해 큰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차분히 설명하고 가르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다. - P156

아마존, CU 편의점, 스트라이프 인터내셔널... 등 글로벌 기업들이 베트남 소매시장에 진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베트남의 상가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높은데 소비 수준은 증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은 소매시장의 ‘무덤‘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상가 점포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 P171

베트남에서 사업하면서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자기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어가 능통한 베트남 직원을 뽑기는 매우 어렵다. 잘 찾아내 키울 수만 있다면 회사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옥석을 가려내고 발굴해 키워나가는 것도 오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P177

그동안 베트남은 수입차에 30% 관세를 부과해왔다. 2018년 아세안... 역내 관세가 사실상 철폐되면서 베트남 수입차 관세가 사라졌다. 연간 6% 후반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베트남은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 P183

호치민시는 2018년 11월 19일 통과시킨 ‘호치민시 주택개발계획‘에 따라 2020년까지 시내 중심... 고층아파트 건설 허가승인을 내주지 않는 대신 노후 아파트 보수와 재건축사업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 또한 현재 건설 중인 지하철 1호선과 같은 교통 인프라 프로젝트로 도심의 교통혼잡을 완화하고 지역주민들이 외곽으로 이주하도록 장려할 계획인데 이것은 서울 인구를 경기도권으로 분산시키려는 정책과 비슷하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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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정당하다 - 중국 여성노동자 삶, 노동, 투쟁의 기록 전태일 50주기 공동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 3
뤼투 지음, 고재원.고윤실 옮김 / 나름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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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 "..."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민과 노동자는 시종일관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항상 미디어의 냉담과 외면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류이거나 스스로 주류 사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경청하기를 거부하고 경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그들의 목소리는 늘 존재해왔고 메아리 치고 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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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일기를 읽다 - 레이 황의 중국 근현대사 사색
레이 황 지음, 구범진 옮김 / 푸른역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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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쓰시마 해협에서 러시아 함대를 섬멸했던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왕양밍 사상의 신봉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의 글과 말을 통해서, 장제스는 자신이 왕양밍을 따르게 된 것이 러일전쟁 직후 일본에서 학생으로 있으면서 일본 육군과 해군의 장교들이 보여준 모범에 이끌렸기 때문임을 인정했다. - P11

이 새로운 상부구조의 비효율성과 불안정한 여건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기능과 짝이 맞는 보완적인 사회구조라는 견지에서 민간 부분의 지원도 얻지 못했다. 장제스가 끌어 모은 조각들은 대부분 파괴된 구질서로부터 건져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만들어지자마자 혹독한 시련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총통은 자신의 정력과 임기응변으로, 중국이 근대 세계 속에 자리를 잡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군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 P15

나의 설명은 종래의 많은 저술들과는 정말로 다르다. 의견에서만이 아니라 기본 사실에서도 다르다. 나의 설명이 이 주제에 관한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나 자신을 장제스 전문가라고 칭할 수도 없다. 또 그렇게 되고픈 야망도 없다. 차라리 나의 설명은 빈 곳을 메우는 도구라고 하겠다. 이 도구를 써서, 최근 들어 이용이 가능하게 된 자료들을 근거로, 오늘날의 중국을 바라보는 나의 거시적 안목을 검증해 보려는 것이다. - P27

불법화된 공산당원들은 어쩔 수 없이 무장한 농민들을 지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사치스러운 국제주의와 도시적인 외관을 점차 포기했고, 밑바닥의 촌락 단위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났다. 비록 수십 년 뒤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지만, 그들은 중국의 미래에 큰 힘이 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그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1927년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그토록 대담무쌍한 전사가 되고 그토록 열성적인 일꾼이 되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 P80

그 후로 오랫동안 장제스는 그의 자의성 때문에 비판을 받을 운명이었다. 비판자들이 주못하지 못한 점은 장제스가 이 과업을 잘 수행하기 위해 갖고 있던 자원을 극한까지 동원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끊임없이 능력 이상의 책임을 떠맡았고 부하들에게도 똑같은 걸 요구했다. 이 때문에 대안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자의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81

1927년의 중국에 있어서, 북벌은 단지 사회의 많은 구성 요소들을 뒤흔들어 느슨해지도록 만들었얼 뿐이었다. 조화를 가져올 기초가 다져지고 상부와 하부 사이에 지속가능한 상호 연계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이 과도기 동안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을 이끌어 가려 애쓰는 가운데, 자신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의 바람도 수용해 주어야 했다. - P87

..., 적정한 한도를 넘어서려 한 경우가 있긴 했어도 쑹메이링은 정부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않았다. 그녀의 문제는 주로 대중의 각광을 지나치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 언론의 기자들이나 편집인들이 원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백설공주의 이미지를 창조하려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사태가 자신들이 기대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들은 이 이미지를 늙은 마녀의 이미지로 대체해 버렸던 것이다. - P110

그러나 나는 그의 기록이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 그는 결코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모든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잔학한 행동에 대해 그는 오직 성공에 의해서만 속죄를 구할 수 있었다. - P123

도쿄의 일본 정부는 육군의 행동이 어디선가 멈추리라 기대하면서 적대행위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선포했다. 그러나 군부의 행동을 가장 미적지근한 형태로라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조차 보일 수 없었던 정부는, 음모를 획책한 자들이 이루어 놓은 기성사실을 한 단계 한 단계씩 추인했고, 그들의 불쌍한 대변인이 되었다. 이제 정부의 입장은 늦게나마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불신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 P131

장제스에게 있어서 다음의 6년 동안은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 그는 모든 종류의 반대자들과 대면했다. 바깥세상에서는 그에게 온갖 종류의 동정을 보였지만,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주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이 시련의 시기 동안 스스로의 길을 가면서 나라와 국민에게 가장 실질적인 공헌을 했다. - P133

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는 대부분 비판을 받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중국이 벌인 투쟁의 성격과 범위를 통찰할 만큼 깊이 있는 설명을 보이지 않는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실패한 진짜 원인을 파악하기엔 너무나도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일차 사료에서 뽑아낸 거리낌 없는 관찰과 수량 데이터는 문제의 근원과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중국 문명 전체가 스스로를 갱생시킨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 P158

여기서 우리는 중국이 국제적인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중국은 하나의 근대 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상하이 전투로 인해 중국인들은 민국 시기에 들어 처음으로 그들의 군대가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통일된 지휘 체계 아래 놓아게 된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 P169

요컨대 장제스는 중국이 일본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데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친구인가? 적인가?>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강점은 그 후진성에 있었다.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중국은 경제 법칙을 무시하고 법률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였다. ......
훗날의 사건들은, 아주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가 모든 측면에서 옳았음을 입증했다. 실제로 일본의 전력은 지나치게 산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낙후된 경제와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 시스템을 갖고 있떤 중국 역시 그 한계까지 혹사를 당했고 거의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 P189

장제스의 황허 제방을 터트린 일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희생된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어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사의 경우, 이 도시의 상인들은 서양식 교육을 받고 모스크바와 나폴레옹의 선례를 알고 있던 자유분방한 선전가들과는 벌써 태도가 달랐다.... 광저우와 위한머우의 경우에서, 총사령관 장제스는 지역 파벌에 유의해야만 했다. - P203

장제스의 접근법은 사람을 본위로 했고 직관적이었다. 마오쩌둥의 접근법은 사람이 아니라 방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당시의 위기를 임시변통으로 다룬 반면, 후자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갈라진 틈새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뒤늦게나마 두 종류의 운동이 다른 목적에 복무했음을 보기 시작했다. 또한 두 운동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우선 일본에 저항하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했고, 그 다음엔 중국의 변신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 다 동등하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 P227

우리가 검토했듯이, 장제스의 전체적인 전략은 다름 아니 기회주의자의 접근법이었다.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과감한 모험을 걸었던 것이다. 적보다 더 오래 버티겠다는 모호한 생각을 제외한다면,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도 일정표도 없었다(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일본도 이런 측면에서 나을 게 없었다). 그의 용기는 중립적 입장에 섰떤 방관자들로부터 동정을 살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국의 동맹국들을 괴롭혔고,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멸시를 초래했다. 장제스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런 수모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감내하려고 투쟁했다. - P280

서양식 교육을 받았던 우리 젊은 장교들은, 동료 장교들을 의형제 아니면 잠재적인 경쟁자나 적으로 상대해야만 했던 이런 상황에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런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293

"중국군에게 원정은 일종의 일상생활이었다. 그들은 쌀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행군 중에 말에게 먹이를 주었고 캠프에 청과물 가게를 차렸다. 그들은 집안 살림 같은 일을 하고 모든 음료수를 끓이느라 시간을 썼다." - P414

그는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다짐했다. "...... 그 어떤 고통과 수치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 ...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이 결심을 철회해야만 하게 되리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P467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 50년 전에 간과했던 한 가지 요인은, 그처럼 거대한 변화가, 특히 시간이 그토록 짧았던 것...이었다면, 불가피하게 엄청난 혼란과 끝없는 희생을 야기하리라는 점이었다. 스틸웰과 장제스가 중국군의 지휘권 문제로 막다른 길에 봉착했을 때, 진정한 이슈는 동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주로 중국의 인적 자원을 전쟁을 끝내는 데 사용하길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4년 무렵, 농촌의 사회 구조가 과거의 몇 백 년 동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상황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적어도 내륙 지역에서는 이미 동원 능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 P480

문서의 기록된 증거에 따르면, 나중에 중국 공산당이 총동원을 실시해야 했을 때 그들은 먼저 농촌의 토지 소유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단 그 일에 착수하자 적절한 순간에 머추어 이익을 챙길 만한 방도가 없었다. 그것은 수백 년의 세월이 남긴 혼란을 제거하는 것으로, 당장에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극단적인 수단을 피할 수 없었고 온갖 잔인한 행위도 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운동은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그 배경으로 하지 않고서는 진행될 수 없었다. 오직 위기에 직면해서만 중국은 필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국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개조해야만 했다. - P481

작살이 바로 그 자식의 명치에 꽃혔다. 그리고 그를 꿰뚫었다. 그것은 깨끗한 안타였다. 그러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할 힘조차 잃어 버렸으면서도,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게 "알았더"고만 말했따. - P490

스틸웰이 미국 정부에 의해 소환되었다. 그것...은 올 한 해 동안 내내 안팎의 모든 어려움 가운데 핵심이었다. 그로 인해 초래된 깊은 고뇌가 내 삶의 다른 모든 것을 넘어선다. - P502

8년의 전쟁 동안 장제스가 견딜 수 없는 순간을 수없이 견뎌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런 긴장 앞에서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그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 스틸웰에 따르면 장제스가 기도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일기는 그가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삶과 가족을 거느린 사람의 삶에 더하여 수도사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 P517

나는 그에게 장제스와 마오쩌둥, 그리고 심지어 덩샤오핑 같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역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등장한다. 그들이 대표하는 대중운동이 계속 진행되는 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계속 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진정으로 선택할 수가 없다. - P526

혁명을 확대하려는 그들의 초기 노력에서 공산당은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아무 주저함도 없이 인간의 악한 본능을 이용했다. 그러나 일단 상황이 안정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되자, 그들은 매두 엄격한 규율을 강제할 수 있었다. ... 그것은 한 문명의 몇 단계에 걸친 붕괴를 통해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상대로 투쟁했다.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등장하여 질서를 잡았고 문명에 때 묻지 않았던 천진한 야만인들을 길들였다. 독자들은 이것에 매혹될 수도 있고, 또는 이것을 경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농민과 농민 출신 병사들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국 공산당은 수십년 동안 수많은 중국인들을 통제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 P538

경제 원조가 중단된 1965년까지, 미국은 타이완에 무려 14억 달러의 거금을 쏟아 부었다. 이 조치는 대륙의 중국인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근대화와 자본 축적으로 인한 엄청난 고통으로부터 타이완 사람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타이완의 사례는 ..., 중국 공산당에 압력을 가하여 훗날 중국 대륙의 경제 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 P567

묘하게도 그가 노년에 느꼈던 좌절감은 마오쩌둥의 그것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근대 중국을 위해 새로운 상부구조를 창출했던 거는, 더 이상 잘 할 수가 없었거나 혹은 자신이 한 때 장악했던 것을 유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대로 내버릴 수도 없었다. 중국의 하부구조를 다시 짰던 마오쩌둥은, 자신이 해방시킨 거대한 대중에 직면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571

이 책의 목표는 무엇인가? 첫머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중국 혁명의 결산을 확인하고자 한다. 장제스와 국민등은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상부구조를 창조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하부구조를 해체하여 다시 꾸렸다. 경제 개혁을 통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의 새로운 제도적인 연결을 시도하는 일은 덩샤오핑과 그 추종자들에게 달려 있다. ... 서로를 전범과 비적으로 부르는 습관은 이미 사라졌다. 다음에 사라질 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이어야만 한다. - P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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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일기를 읽다 - 레이 황의 중국 근현대사 사색
레이 황 지음, 구범진 옮김 / 푸른역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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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부/모-하부/등은 둘을 연결이라는 시야 좋고, 장對모의 비교도 설득력 있다. 장에게 주어진 역할은 너무 크고 새롭고 비정했지만 도구는 절망적일만큼 낡았으며 견디는 것 외엔 출로도 없었다. 그래서 한치 앞도 안 보이는 포연 속을 미친 듯한 성실성으로 달리며 자신을 격려키위해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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