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효용은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가장 넓은 의미의 개념이어야 한다. (34)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38)
이단자들에게 이렇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생기다보면 무엇보다도 이단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공정하고 엄밀한 토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아가 그런 토론을 가로막고 그것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한다고 해서 이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통 조류의 의견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모든 탐구를 금지할 때,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이단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단이 아닌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이단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들의 정신 발전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고 이성 또한 위축되기 때문이다. (71)
전도유망한 지성인들이 소심해져서, 비종교적 또는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용감하고 씩씩하게 독립적인 생각의 날개를 펼칠 엄두를 못 내게 될 때,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 이 예외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지성을 사회의 통설과 조화시키기 위해 솟구쳐 오르는 지성의 힘으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독창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애쓰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상가라면 모름지기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위대한 사상가를 위해서만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뛰어난 사람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그런 자유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각자 타고난 능력만큼 정신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72)
그저 단순히 관습이니까 따른 다는 생각이라면, 이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은 어느 것도 교육, 발전시킬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지각, 판단, 특이한 감정, 정신 활동 그리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와 같은 능력들도 오직 선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단련될 수 있다.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지만 하는 살마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이나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114)
이런 모든 이유들이 서로 합쳐져서 개별성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개별성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애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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