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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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 등에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에거는 이렇게 말하고 어깨에 맨 가죽끈을 고쳐매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의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고요함은 완벽했다.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심장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산의 침묵이었다. (7)

"한 남자에게서 그 사람이 가진 몇 시간을 사들일 수 있고, 그 남자의 며칠을 훔치거나 심지어 인생 전체를 빼앗아갈 수도 있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한 남자에게서 단 하나뿐인 순간만큼은 가져가버릴 수 없어.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그러니 이제 날 좀 내버려두게!" (50)

애거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철천지원수가 자기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러시아 병사가 사라진 뒤 고독은 이전보다도 훨씬 깊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88)

몇 주가 지난 뒤 에거는 수용소 야영지 뒤편 자작나무 숲에 묻힌 사망자 수를 세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죽음은 빵에 곰팡이가 피듯, 삶에 자연스럽게 속해 있었다. 죽음은 열이었다. 죽음은 굶주림이었다. 죽음은 막사 벽에 생긴 틈이었다. 겨울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틈. (92)

어린 시절 에거는 그 시절이 자신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시간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과거는 여기저기에서 구부러져 있는 것 같았고, 모든 사건의 경과는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 되거나, 아니면 독특한 방식으로 거듭 새로운 형태를 이루고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에거가 러시아에 머물렀던 시간은 마리와 함께 지낸 시간보다 훨씬 길었지만, 코카서스와 보로실로브그라드에서 보낸 세월은 그녀와의 마지막 날보다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98)

확실히 사람들은 산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믿는 무언가를. 에거는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해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관광객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따라온다기보다는, 충족시키기 어려운 어떤 알 수 없는 갈망을 좇아 비틀거리며 산을 오른다고 점차 확신하게 됐다. (179)

에거는 새로 마련한 집에서 아늑한 기분을 느꼈다. 때로는 이곳 고지대에서 사는 것이 외롭다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고독이 결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자신이 필요한 것은 모두 가졌고, 이것으로 충분했다. 창문 밖으로 드넓은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난로는 따뜻했다. 난방을 한 상태에서 처음 보낸 겨울이 지나자 코를 찌르는 듯했던 염소와 가축 냄새도 말끔히 사라졌다. 에거는 무엇보다 고요함을 마음껏 누렸다. 그동안 골짜기 전체를 가득 채웠고 주말만 되면 산비탈에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던 소음은, 이제는 어렴풋한 예감으로 그에게 스치듯 다가올 뿐이었다. (140)

"너무 오랫동안 못 봤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 이야기를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마리! 인생 전체를, 참 오래도 산 인생 이야기를 들려줄게!" 에거는 소리쳤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꾸도 없었다.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렸다. 바람이 땅바닥을 스치자 올해 마지막까지 남은 눈을 흩날리며 울부짖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145)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군." 에거는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말한 몇 마디 단어가 눈앞에 둥실둥실 떠 있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그마한 달빛을 받으며 터져버리는 광경을 보았다. 에거는 심장 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고, 자신의 상반신이 서서히 앞으로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쪽 뺨이 탁자 표면에 닿았다. 에거는 그런 자세로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멈추자,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심장이 다시 뛰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자,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죽었다.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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