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독 후 단상 휘리릭 기록.


1.      [굿à 삼각프레임 나름 유용하다] 머리 복잡해서 중국/일본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노동/작업/행위라는 세 꼭지점 프레임은 상당히 유용하다고 봄. 왜냐하면 이 프레임 가지고 볼 때 일본과 중국의 현상이 선명하게 보였거든. 역대 전체주의 국가에서 기술/생산에 집착하는 모습도 그렇고.

    장인의 나라, 일본: Oh No! 일본이 근대화 이후 민주화(개개인이 다원화된 정치의 주체로 활성화되는 것, 플러스 그런 공론장의 활성화)된 적 없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 정치력이 거세된 채 물건 잘 만드는 것으로 삶의 의미, 세계의 경험을 대체하려고 함. 그리고 알고 보면 딱히 장인도 아님. 장인이면 하나의 작품을 목적(사유, 이상)을 가지고 불멸을 꿈꾸며 하나 딱 만들어야 하는데, 이 장인은 그냥 상품 제작자임. 이 책으로 말하자면 공론장에서의 말이 거세된 채 반복하여 제 몸과 더불어 일하는 (일하지 않으면 죽으므로 노동은 필연적) 노동하는 동물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음. 쩜프를 좀 해야 하지만 이 책 읽으며 아우슈비츠의 Arbeit Macht Frei도 여러 번 생각났음

    중국의 경우도 일본과 양상은 다르지만 비슷함. 아무리 사물이 풍부해져도, 아무리 자연을 마음대로 제것 삼아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행위/정치의 풍요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야. 이번 시진핑 일 보고 깜놀했음

    북한은 이 책에 나오는 고립된 전제군주에 딱 맞는 상태. 권력(아렌트적 의미에서)이 없는 곳, 공유되지 않는 힘과 획일성 강요하는 폭력만 있는 곳.


2.     [배드1à천리길도 한걸음부터에 해당하는 아이디어 한 방울이 없다] 용서와 약속이 행위를 되살리는 조건이 되는데, 행위 자체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이 두 조건...도 그 자체로 매우 연약함.

- 의무적으로 용서하라 할 수 있나? 전제군주(고립된 힘, 폭력)에게 약속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나?

- 그리고 이건 문화적으로도 다 달라. 기독교는 용서와 약속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문화인지 모르겠지만(실제 역사 보면 전혀 그렇지도 않고), 나 사는 이곳은 용서보다는 천벌이 자연스러운 곳. 행위, 활동은 지금까지 쭉 망쳤어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가능성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데, 죄 값에 맞는 벌 내리는 것은 용서보다 훨씬 더 좋은 행위’, 훨씬 더 좋은 시작일 수 있어. 왜 그런 생각 못 하고 이 부분 쉽게만 가려고 하나? 그리고 앞에서 말했지만 약속만큼 허무한 게 어디 있어. 셋째로, 서양에서는 약속이 미래에 있다고 보지만 그것도 서양적, 그러니까 지역적 사고일 수 있어. 중국식 사회에서는 약속은, 이상은, 고대에 있었어(하긴 아렌트에게도 이상은 아테네에 있다고 볼 수 있지).

물론 폴리스라는 공기가 행위를 자연스러움을 보장한다는 것과, 입법과 투표가 용서와 약속의 기능을 했다는 건 이해하나 이미 행위가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진 근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 조건을 언급한 뒤에 아무런 Action Plan이 없다는 것은 공허함. 모르지, 다른 저작에서 그 작업했을지도. 비교해서 미안한데, 적어도 가라타니 고진은 훨씬 명료하게 말하고(아렌트는 초반-중반까지 서술이 너무 난삽함) 그러면서 증여를 제안하고 그 액션플랜으로서 평화헌법9조 백프로 활성화를 제시하는데, (둘 사이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이게 훨씬 와 닿음.


3.     [배드2à 아테네 폴리스 말고 대안 정체(政體)가 있나?] 이 책 읽으며 정말 내내 궁금했는데, 우리의 삶에서 행위라는 층위를 소생시켜야 한다는 방향성은 알겠고 공감해. 이건 목적Goal. 그런데 그 목표(objectiveoutcome, 실질적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에서 아테네 폴리스 외의 대안이 무엇임? 폴리스 좋아하는 거 알겠는데, 그것도 1장 노동에서 누누히 이야기되었듯이 노예가 있어서 가능한 거였잖아. 보이지 않는/사적 영역에서 삶의 필연성을 충족시켜주는 그들(노예와 여성)이 있었기에 아테네 시민의 폴리스 참여가 가능했잖아. 근대에 와서는 그 노예짓을 이른바 제3세계에게 맡겼으니 서구에서는 대의민주제+시장 훨훨 날아 발전한 거구. 그리고 아렌트식으로 보자면 대의민주제는 절대 대안이 될 수가 없어. 그건 명백하게 정치의 시장화니까. 그니까 현실은 전혀 방향으로 삼을 수 없어. 그렇다고 고대로 갈 수도 없어. 그럼 어디로 가자는 거임?


4.     [배드3à 행위의 주체는 어떻게 생겨나는데? 가정은 그저 사적/반정치의 영역으로 놓아버리면 되는 거야?] 이 책의 삼각 프레임이 서양 역사 전체를 훓는 거대 프레임이라 이런 말 하면 사소하게 딴지 거는 거 같지만, 그래도 계속 궁금했어. 저자는 가정을 사적인 영역, 드러나지 않는 영역, 힘과 폭력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아예 놓아버리고 있어. 폴리스에서는 이 가정의 대표, 아니 주인이 폴리스로 나가서 행위를 한 거. 근데 이제는 노예도 없고 여성도 (예전의 의미에서는) 없어. 이런 발전’은 인정하고 이어가야 하잖아. 그러니 이제는 가정을 논외의 영역으로 놓아버릴 수 없는 거 아님? 가정의 정치/행위의 가능성이 가정 밖에서 이 시대의 폴리스를 만들어낼 가능성과 연동하는 것 같은데.

근대의 사회란 사적영역이 공화된 것이고 공적 영역에 요구하는 것은 사익의 보장이라는 것은 알겠어. 사인, 가정, 가문들이 이권투쟁하는 사회는 획일화된 공간이라고 보는 것도 알겠고. 그러나 이렇게 기왕 성립한 사회에서 어떻게 다원성, 다원적 주체들을, 그들의 공간을 창출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너무 없는 거 아님?

예전에 독립운동을 해도 반독재운동을 해도, 늘 운동가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로 리더들은 골머리를 앓았어. 대부분 학교 설립이라는 싱거운 결론으로 흐르긴 했지만. 새로운 문화, 진정 새로운 활기를 어떻게 이 세계 내에, 그리고 각 인간의 심장에 불어넣을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아이디어도 안 보이는데, 어찌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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