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 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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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흡연자다. 담배는 비싸다. 또한 내게 주어진 최상의 선택이다. 무슨 뜻이냐고?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그렇다. 언제나—기진맥진해 있다. 담배는 자극제다. 한 발짝도 더 딛지 못할 만큼 피곤할 때 담배를 피우면 한 시간은 더 버틸 수 있다. 분노가 치솟고 사람들에게 시달려 극도로 기분이 저조하고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 담배를 피우면 아주 잠시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흡연은 내게 허용된 유일한 긴장해소법이다. 현명하진 않지만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쓰러지거나 폭발하는 것을 막아주는 단 하나뿐인 대책이다. 다른 대책은 아직 찾지 못했다. (23)

냉혹한 빈곤은 뇌의 장기적 사고 기능을 중단시킨다. 아빠가 다른 애 넷을 낳은 사람들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약간의 연줄이라도 바로 그러쥐는 것이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허기를 채우는 것보다 더 기초적인 욕구다. 단 한 번, 한 시간 동안 내가 어여쁜 존재임을 느끼게 해줄 사람들에게 가는 것. 그리고 그 한 번의 한 시간이 우리가 얻는 전부다. 우리가 장기적으로 그들과 어울릴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지만, 지금 그 순간 그들은 우리가 강력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 우리는 장기적인 일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가슴만 아프게 될 뿐,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눈에 보일 때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할 뿐이다. (24)

가난한 사람은 수백만 명이다. 우리의 성격과 배경이 다양한 만큼이나 우리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처하는 법들 또한 다양하다. (26)

이는 거대한 사회적 문제이며, 우리는 기술혁명과 지구화가 여러 방법으로 불평등을 지대하게 증가시킨다는 것에 대해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참이다. 평범한 시민은 이에 책임이 없다. 또한 개개 기업을 탓할 수도 없다. ‘우리’가 ‘집단으로서 함께’ 결정을 내려온 방식이 문제다. (28)

따라서 내가 필요 이상의 정성을 기울여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건 내 상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동료들을 위해서일 것이다. 하층계급에서는 확실히 서로의 뒤를 봐주는 경우가 아주 많다(상류계급끼리만 뒤를 봐주는 일을 한다면 불공평하지 않나). (60)

정말 솔직해져볼까?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가 너무 두려웠다. 내가 설교를 가장 많이 듣고, 섣부른 판단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는 때는 의사의 진료실이나 사회복지사 옆에 있을 때다. 그들은 나를 엄청난 멍청이로 취급한다. 내가 가진 다소 심각한 문제를 스스로는 알아챌 능력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는 손을 쓸 능력이 없는 것일 뿐이다. (87)

내가 가장 가난하게 느껴질 때는 대부분 나를 돕는 것이 자기 일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일은 거지 같고 그들이 과로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나 또한 진상 민원인이 되지 않으려고 정말 애쓴다. 서류와 질문 목록을 미리 다 준비하고, 추천서와 급여명세서와 병원비 청구서 등 모든 것을 챙긴다. 주제별로 분류까지 깨끗이 해놓는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준비 못 할 때는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를 질문 목록에 미리 적어둔다. 하지만 이게 전혀 소용없을 때가 많다. 나는 가난해서 미국 시민에게 제공되는 혜택의 수급자격이 되어 그걸 신청하고 있는데 일부 사람들의 눈에 그런 내가 인간 이하로 보이기 때문이다. (94)

좀 사는 사람들은 느낄지도 모르겠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필요 이상으로는 조금도 더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유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을 말이다. 그건 우리에게 있는 자원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게으르지 않다. 그저 가능할 때 쉬는 시간을 비축할 뿐이다. (97)

누군가가 희망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다. 나는 낙천적 성향이 아니지만, 기분이 좋은 척하는 것이 아닌, 진실로 삶에 대해 낙천적인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좋아한다. 그런 이들은 전염성이 강해서 나같이 심술궂은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낙천성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마치 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보다 더 함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묘사는 생각할 수가 없다. (109)

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남의 감정을 걱정할 시간도 기력도 없다. 전문직 세계에선 하나같이 서로를 기분 좋고 안온하고 편하게 느끼게 하려고 어찌 그리 애를 쓰는지 정신이 산란해질 정도다. 이해가 안 된다. 내게 그런 노력은 일의 일부가 아닐뿐더러 일을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 누가 내게 의견을 구하면 나는 그저 의견을 말한다. 5분 동안 날씨에 관해 얘기하거나 셔츠가 참 근사하다는 등 입에 발린 말을 먼저 하는 수고 따위 하지 않는다. … 노숙자 옆을 지날 땐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부류들이 자신을 향한 직장 동료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것이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나의 감정에 관해 얘기하면서 전문직으로 일할 때 썼던 시간의 반이라도 낭비했다면 나는 곧 일자리를 잃고 화이트칼라 동료들이 조금 전에 쌩하지 지나쳤던 그 노숙자 바로 옆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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