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두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겨 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덩리쥔에게 물만두를 빚는 일은 가족끼리 진하게 오가던 정과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홍콩에서 혼자 살 때, 식사를 차려주던 밍 언니...에게도 물만두 빚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물만두를 빚으면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사소한 일까지 하나하나 어찌나 잘 기억을 하고 있는지 놀라웠다. 밍 언니는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다듬고 밥을 하면서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하던 때를 떠올리면, 다정다감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던 ‘아가씨‘의 목소리를 이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다고 했다. (34)
"덩리쥔이 가요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자기 노래의 장점과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전쟁의 공포가 지나간 뒤 물질적 풍요와 희망이 시작된 시대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필요로 하는지 알았던 거지요.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졌던 것입니다." (83)
"덩리쥔의 가창 능력은 오페라 가수와 비슷하며 공연 예술의 정수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녹음실에서든 공연장에서든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은 마음과 일치된다. 이러한 일치성은 관객을 공감하게 하고, 나아가 그녀를 받아들이고 또 좋아하게 만든다." (88)
덩리쥔은 외국어를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홍콩에 온 뒤 별 어려움 없이 광둥어를 익혔고, 상하이어도 아주 잘했다. 타이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창한 수준이었지만 상하이어는 평소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잘한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베트남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 프랑스어에 매료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덩리쥔은 프랑스로 건너가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 외에도 집으로 가정교사를 불러 일대일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프랑스어 교재의 녹음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었다. 아침이나 오후 한나절은 꼬박 언어를 공부하는 데 쏟았다. ... 그러나 덩리쥔은 무엇이건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면 전심전력으로 노력해 목표를 이뤄냈다. 필요하기 때문에, 활용하기 위해 배운다기보다는 그 언어에 관심이 있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노력하는 것이었다. 덩리쥔은 자유자재로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31)
"노래 천재는 그 민족에게 수십 년간 쌓인 감정의 분출구다. 하늘이 내린 재능, 혈통과 상관없이 조용한 의지의 표현이다. 덩리쥔의 노래가 바로 그렇다." (205)
덩리쥔은 이런 비판적 언론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좋아하는 중국의 팬들을 걱정했다. 덩리쥔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여러분이 제 노래를 듣다가 처벌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한 빨리 모든 테이프를 제출하십시오. 저 또한 앞으로는 좀더 순수한 곡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221)
그 시절의 중국은 막 문화대혁명의 정신적 긴장 속에서 벗어난 상태였고, 그렇기에 대중은 평화와 안정에 목말라 있을 때였다. 덩리쥔의 정치색 없는 노래는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노래를 들어야 했던 피로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덩리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오랜 시간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켰다. 덩리쥔의 선율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 사랑에 대한 갈망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대변했다. 이는 권력으로 짓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221)
덩리쥔의 또 다른 팬은 어쩌면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인데,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로 부른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일본 점령기의 타이완 원주민 가요는 사실상 ‘비정가곡...‘...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들은 해방 이후 타이완의 영광된 모습을 기대하고 그리면서 지금의 고통을 참아냈다. <우야화...> <쇄심련...> <보파망...> <소육종...>은 당시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시대적 아픔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타이완 원주민 언어로 된 옛 민요는 덩리쥔의 리메이크를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었다. 비침한 슬픔의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위로의 색채를 갖게 된 것이다.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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