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줄리아 아산테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 <몸은 기억한다>에서 본, 극도의 스트레스 경험(트라우마) 시에 종종 나타나는 유체 이탈 경험을 이 책은 임사 체험의 일종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또 아리송. 


전반적으로 우리가 이 시점에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승과 저승 간의 의사소통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이것은 인류가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며,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거쳐 갈 준비가 돼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바와 달리 사자와의 접촉은 살아 있는 사람들, 즉 생자...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다양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중 가장 작은 이득은 슬픔을 덜어준다는 점이고, 가장 큰 이득은 우리의 가치관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방향으로 재설정된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이 접촉은 사자에게도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이 된다. (11)

그렇게 임사 체험 때 일어난 일에 대한 당신의 거짓 증언은 사람들을 호도할 뿐 아니라 개별 종교와 전혀 상관없는 빛의 존재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당신의 증언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연구를 폐기하는 데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결국, 당신의 진짜 임사 체험은 신화와 관련된 허튼소리로 간주되고, 사장될 것이다. 이처럼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덮어 가리다가는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17)

평범한 인간의 영은 아예 상대하지 않는 영매들도 있다. 그들도 정보를 얻기 위해 육신 없는 인격인 영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하지만, 그 영은 이제 물리적 실존에 연연하지 않는 영적 스승, 영적 ‘독립체‘다. 그런 영의 의식 영역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의 의식 영역보다 훨씬 광대하다. 그런 영의 가르침은 주로 깊은 트랜스 능력이 있는 뛰어난 영매를 통해 채널링된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나는 이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영매는 보통 자아와 현실 구조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넓혀주려고 애쓰며, 그 과정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수적으로 전달된다. (211)

그렇다면 인간이 죽어서 땅속에 묻힐 때 생전에 경험했던 모든 것도 사라지는 것일까?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정체성의 어떤 부분도 죽어 없어지지 않으며 에고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에고가 내세에서도 현세에서처럼 모든 일을 관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에고가 현세에서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내세에서도 만들어낼 것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에고가 한편으로 확장을 계속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느긋이 쉬면서 자아의 다른 부분과 통합하게 된다는 의미다. (238)

사후 세계의 비…국소적… 현실에는 더 심오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에서는 에고가 거의 무의미하다. 영혼이 확장하는 장엄한 과정에서 에고는 아이의 순간적인 기억과 비슷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예를 들어 네 번째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 끄던 기억은 그 순간의 자신을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는 있지만, 그저 그것뿐이다. 향수에 젖어 그 추억에 빠지고, 심지어 마법처럼 한때 자신이었던 그 아이가 돼보는 경험을 하고, 그 아이가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의 일부임을 깨달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아이로 존재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아이는 자신의 더 위대한 정체성의 아주 작은 일부로 포함돼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확장을 되풀이하는 자아는 애정 어린 몸짓으로 에고를 포용한다. (238)

죽음이란 불길한 운수, 유전적 불운 혹은 세포가 미쳐 날뛴 결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런 생각은 죽음이 개인적인 선택이라는 설명보다 적합하지 않다. 나는 ‘죽음을 선택한다’는 주장에 분노할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극심한 비탄에 빠진 사람이 그런 주장에 격노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에 대해, 그리고 심령의 행복 유지를 위해 죽음이 하는 심오한 역할을 진정으로 이해할수록 우리는 이런 주장을 더욱 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영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사후 세계에 대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면, 왜 그처럼 많은 사람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처럼 오래 기다리는지가 오히려 의아해질 것이다. (289)

나이나 병세와 관계없이 죽음을 앞둔 환자는 일반적으로 자신 때문에 주위 사람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죽음을 앞당기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 죽음을 미룬다. 대부분 환자는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며, 심지어 자신이 숨을 거둘 수 있게 주위 사람들이 허락해주기를 바라는 환자도 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세상을 뜨지 못하고 무리하게 죽음을 미루고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두려움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보낼 준비가 됐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누이가 죽음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남자도 있다. (317)

우리 사회는 죽음의 경이롭고 긍정적인 면을 이제 막 인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죽음을 맞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면, 우리는 환자가 죽음을 맞는 다양한 방식과 그 순수한 창의성에 감동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어떻게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는지, 육신이 심령과 힘을 합쳐서 어떻게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혼을 물질계 밖으로 보내는지를 본다면 놀라서 말문이 막힐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 자신은 주위의 주구보다도 죽음을 맞는 과정을 더 깊이 알고 있으며 그 경이로운 과정에 더 잘 준비돼 있고, 더 편안하게 그 과정을 따른다. 죽음은 자아의 더 위대한 차원을 열어놓는다. 육신이 망가져서 더는 삶을 계속할 수도 없고, 삶에서 어떤 보람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선택은 기쁘게 죽음을 맞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심령과 지구를 건강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320)

죽음의 과정에서 어느 단계에 있든, 사후의 여정을 안내할 도우미는 바로 건너편에 서 있다. 그들은 먼저 간 배우자, 부모, 조부모, 형제 등의 직계 가족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가끔 의외의 인물이 도우미로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다니면 다른 생애에서 알았던 사람이 맞이하러 찾아올 수도 있다. 애완동물이 마중 나와서 주인을 매우 기쁘게 하기도 한다. 나의 사촌 카산드라를 처음 맞아준 것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애완견이었는데, 그녀는 몹시 기뻐하며 안도했고, 주인을 다시 만난 애완견도 기뻐 날뛰었다. (330)

빛의 존재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은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독특한 인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짐작건대, 그런 존재는 아주 많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각 임사 체험자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고 선입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으며, 실제로 그들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다양하다. (332)

일반적으로 사자는 자신의 장례식 즈음에는 이미 위대한 환상의 세계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과 더불어 깨우침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평생 고수해온 행동 양식을 고집스럽게 지속하는 경우도 있다. 성질이 고약한 구십 대 할아버지가 자신의 장례식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모든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죽음조차도 남을 통제하고 불신하고 깔보던 그의 오랜 습관을 없애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분이 높은 순서대로 가지런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광경을 보고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337)

거실 천장 바로 아래의 한 지점을 올려다보며 재닛이 연거푸 사과하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도 철저히 지키고 있는 내 나름의 규칙을 하나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 사람과 관련되고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아주 분명하고 정확한 예지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승에 가면 먼저 간 어머니, 남편, 친척, 예수, 천사, 혹은 그곳에 있으리라고 가정한 어떤 존재가 사자를 맞아 주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종교적이고 영적 전통보다는 개인적인 목격담에 바탕을 둔 다양한 사례를 폭넓게 말해주는 편이 낫다. 문턱을 넘어서는 사람에게는 헛된 기대 때문에 느끼는 갈등 말고도 견뎌야 할 일이 너무 많다. (343)

죽음 직후의 시기는 고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접촉이 가장 필요한 시기다. 이때는 차원 사이의 경로가 열러 있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3개월 동안은 활짝 열린 상태를 유지한다. 접촉이 가장 쉬워 보이는 바로 이 시기에 고인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슬픔에 압도돼 제대로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심령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이 접촉을 위한 이상적인 조건을 설정한다. 즉, 접촉을 원하는 양쪽의 강력한 필요, 이승과 저승의 근접성, 격한 감정 등 이 모든 것이 생자와 사자의 가장 명료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점으로 작용한다. … 그리고 그 접촉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신은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그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방심하지 말고 곁눈질로라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도록 하라. 그는 바로 당신 곁에 있다. (360)

핼러윈은 한때 켈트족과 로마인이 겨울철이 시작되기 전 이승과 저승이 가장 가까워지는 날이라고 믿으며 축제를 즐겼던 날이었으나 이제는 그 흉내만 내는 행사를 치르는 날로 전락했다. 사자에 대한 고대인의 존경은 죽음의 어두운 면에 대한 패러디로 전락했고, 행사 자체가 유령, 마녀, 뱀파이어, 검은 고양이, 박쥐 분장과 같은 핼러윈 의상을 차려 입은 아이의 놀이로 격하됐다. 미국에서는 연예 산업체가 핼러윈을 조작된 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공포 영화를 제작할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 (365)

사실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교감한다고 해서 예외적인 존재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그는 하늘 높은 곳에 올라앉아 있는 사람도 아니며, 윤회주기에서 ‘마지막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치유자, 예언자,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우리보다 영적으로 ‘높은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허튼소리 탓에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스스로 부정해왔다. 다시 말하거니와, ‘초자연적’ 활동은 평범함의 소산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모두 마법의 일부이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자들은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후 생존과 초자연적 활동에 대해 과학, 종교,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믿음과 태도를 버리면 사자와의 만남은 더 빈번히 더 정교하게 일어날 것이다. (373)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512) …… 우리가 모두 이렇게 달라진다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누구나 환생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전생에 다른 성별 다른 인종, 다른 사회적 경제적 신분으로 살던 일이 기억나는데도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 인종 간 국가 간에 서로 대립하게 하는 이원론에 우리가 여전히 연연할까? 아니면 서로 돌봐주고, 모든 생물과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배려하는 지구 가족이 될까?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는 또 어떻게 바뀔까? 여전히 죽음을 슬퍼할까, 아니면 새로운 탄생으로 여겨 오히려 축하하게 될까? 죽음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대화할 수 있고, 그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뿐 아니라 더욱 성숙해질 테니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상황이 절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연민과 확장된 의식임을 안다면? 사자의 입장에서는 이제까지 무시돼 오던 자신의 존재가 마침내 인정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514)

물리적 우주란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유형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우주 이외에도 여러 우주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우주 안에서 우리 위치와 우주 자체의 본성에 관한 집단의식은 어떻게 변할까? 우리는 틀림없이 진정한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런 의식적 혁명은 고난, 어려움, 혼란 없이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그 최종적인 성과는 그것을 위해 쏟아 부어야 하는 노력 이상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살고 행복해지고 놀고 사랑하고 우리 자신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전재는 결국 사자들이다. 지상 낙원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 존재도 역시 사자들이다.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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