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옛날부터 보관해온 일정표와 가족들 간에 오갔던 소중한 편지 묶음, 폴이 남긴 사진들, 스케치, 시, 그리고 밸런타인데이 카드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의 쌍둥이 동생인 찰리 차일드는 펜실베이나의 벅스컬트리에 살며서 화가로 활동했다. 폴과 찰리는 매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남편은 편지 쓰는 일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여겼다. 편지를 쓰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고 우리의 일상을 신문 기사 형식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했으며 편지를 쓸 때만 사용하는 전용 만년필을 들고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글씨체로 일주일에 서너 장, 길게는 여섯 장의 편지지를 채워나갔다. 때로는 우리가 가보았던 곳의 스케치나 사진을 동봉하기도 했다.... 반쪽을 떼고 남은 입장권이나 신문 기사를 오린 것으로 미니 콜라주를 만들어 보낼 때도있었다. (15)
파리는 마치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는 것 같은 여기 냄새가 났다. 재채기를 하면 손수건에 끈끈한 진액이 묻어나왔다.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탁한 안개가 파리 시내를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안개가 너무 짙어 비행기 이륙이 전면 금지되었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증기선도 며칠 동안이나 항구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개와 관련된 얘깃거리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았다. 길을 잃어버릴까봐 밤새도록 차에 있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엉뚱한 방향으로 몇 시간을 운전해서 가다보니 파리 외곽의 지하철역이 나오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 안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며들었다. 집 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름이 방안을 메우다니, 정말 황당했다. 왠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35)
폴이 관리해야 하는 프랑스 직원들이 열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모두 ‘무슈 시이일드‘를 좋아했다. 그러나 미국인 동료들은 폴이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다고 했다. 남편은 전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자신이 이룬 성과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인맥을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속적인 야망이 없었다. 높은 자리로 빨리 올라가려는 이들에게는 각 분야의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한다든지 자주 만나 친분을 쌓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폴은 점심시간이면 카메라를 메고 센 강변에 홀로 앉아 샌드위치를 먹곤 했다. 아니면 점심시간에 집에 들러 나와 함께 닭고기 수프나 소시지, 청어 같은 남은 음식을 대충 먹고 잠깐 눈을 붙이다 가기도 했다. 이런 습관이 그의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지만 그런 것쯤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파리에서 함께하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47)
참을성 있게 줄을 서 있다가 자기 차례까 오면 간단명료하게 주문을 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마담은 치즈의 숙성도를 알아맞히는 데 도사였다. 카망베르를 달라고 하면,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몇 시에 상에 올릴 거냐고 물어보았다. 오늘 점심에 먹을 것인지, 저녁식사에 쓸 것인지, 며칠 있다가 먹을 것인지....... 손님이 답을 하면, 마담은 상자 몇 개를 열고 엄지손가락으로 치즈를 사정없이 눌러본다음 ‘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고서는 "브알라!"라고 외치며 손님에게 딱 맞는 치즈를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까지 고려해 치즈를 골라주는 그녀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딱히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물건을 골라주는 마담의 솜씨를 구경하기 위해 치즈를 사곤 했다. 그녀는 항상 틀리는 법이 없었다. (55)
어느 날 오후, 포도주 판매점인 니콜라...에 들렀더니 배달원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시를 떠났다고 말했다. 배달원은 가게를 지키며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페라 배역을 따내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의 옆에는 나이 많은 건물 관리인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이십오 년 전에 방돔... 광장에 위치한 고급 양장점에서 재봉사로 일했다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배달원은 라신, 몰리에르가 풍미했고 희가극이 유행했던 황금기를 회상했다. 우연찮게 이들을 만나게 된 나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파리에서는 어느 누구와도 고전문학이나 건축, 혹은 위대한 음악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고물 장수에서 사장님에 이르기까지. (71)
한꺼번이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바람에 정신이 없기는 했으나, 버그나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친절한 분이었고 절제된 행동으로 관중을 사로잡는 타고난 연기자라고 할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설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절대 지치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실수 없이‘ 해내야 한다는 그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훈련을 받았다. 또 그는 이미 알려진 요리법을 간단히 만들어버렸다. 기존의 레시피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조용하고도 근업하게 자기 방식대로 요리를 하는 그는 우리에게 음식의 질감과 풍미를 완전히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니, 마담 시이일드, 대체 무슨 맛인지 설명해보시라고요." (77)
"그래요, 마담 시이일드, 재미있게! 즐겁게!"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었다. 그는 하찮은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 때에도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여러분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먹고 난 후에도, 그것은 늘 여러분과 함께 남아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나......." 나는 버그나르의 열정과 사려 깊은 마음씨가 좋았다. 그리고 그의 그런 면들을 나의 내면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지하 교실의 홍일점으로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농담을 하기도 하고 친절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흡수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79)
프랑스 사람들은 개개인이 내뿜는 기운에 아주 민감했다. 그리고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고 믿는다. 만일 어떤 관광객이 바가지를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노점상에 들어오면 파는 사람은 그 기운을 느껴 그에 부응하듯이 상대방에게 바가지를 씌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느끼기에 손님이 자신의 가계에 온 것을 기뻐하고 물건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면 주인은 한 송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92)
우리는 피렌체, 로마, 소랜토, 나폴리 그리고 코모 호수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피렌체의 피티 궁에 들어간 지 삼십 분이 지나자 아버지는 "아주 교훈적이다"라고 딱 한마디를 하셨다. 불쌍한 아버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을 하셨다. 말도 안 통하고 길거리느 어슬렁거리는 것이 고작이라며 멋진 집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이 그립다고 하셨다. ... 내가 돈 많고 물질적이며 자기성찰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성장하는 내내 내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아버지의 세계관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똑같이 철저하게 무감각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대학 시절, 내가 그토록 미성숙했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13)
프랑스 사람들의 개인주의와 장인정신은 미국의 ‘마셜플랜 사기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미국인 전문가들이 프랑스의 생산성과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제안을 내놓아도 프랑스인들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당신들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중소기업들이 있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도. 우리 국민들은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소. 프랑스에는 부패라는 것이 없지. 나만 해도 발자크에 관한 논문을 쓸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내 상관은 배 과수원을 가꾼단 말이오. 사실, 우리는 당신네들이 제안하는 그런 변화를 원하지 않소." (122)
루앙으로 차를 몰아 점심을 먹기 위해 라 쿠론느에 들렀다. 그리고 프랑스에 온 첫날 먹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이 년 하고도 여섯 달 전 그날에 먹었던 굴과 솔 뫼니에르, 그린 샐러드, 프로마주 블랑, 그리고 커피를. 아! 이번에도 역시 훌륭한 맛이었다. 다만 내가 식당 안에 풍기는 냄새를 폴보다 더 빨리 구별할 수 있었고, 아무런 도움 없이도 주문을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음식에서 느껴지는 예술적 감각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 지난번과 달랐다. 라 쿠론느는 변한 게 없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143)
파리를 떠나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우리는 몽마르트르에 올라가 영화를 보았다. 영화관에서 나온 다음에는 레스토랑 레자티스트를 향해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기에 카이용 씨와 그의 딸 긜고 웨이터 로저와 함께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스토랑을 나와서는 언덕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안에 있는 동안 비가 내렸는지 거리가 젖어 있었다. 등불이 켜지고 도시가 거리의 물웅덩이 안에서 빛났다. 안개 속에 어렴풋한 노트르담 성당을 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어떤 곳에서의 시간이 다해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순간들을 영혼의 눈으로 담아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영원토록 간직하기 위해....... (168)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원조 프로방스 요리사인 르불...이 원조 요리법을 확인해보았더니 분명히 부야베스에 토마토를 넣는다고 했다. 그런데 뭐가 어째? 무지에서 비롯된, 그리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프랑스 사람들의 이런 독선이 나는 진저리가 나게 싫었다(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나의 유일한 비판이다). 사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요리에 관해서는 그 어떤 프랑스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외국인들이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해 자국인보다 더 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227)
한숨이 나왔다. 책을 출간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내 자신이 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일을 해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쉬운 요리법들을 산더미만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열정적으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책이 영원히 출간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이미 내 삶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내 자신을 수련해나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이 앞섰다. 프랑스 요리는 무한하다. 아직도 제과제빵 분야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시도해보고 싶은 요리법도 수백 가지나 있었다. (282)
부모님의 친구들 중에서 친절하고도 교양 있는 어떤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유럽경제공동체라는 것 말이야,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대체 그게 뭔가?" 나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미국을 떠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교향 시민들은 세계의 정치나 문화에 대해 무지했고 그저 돈 버는 일이나 일신의 편안함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르웨이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선하고도 강건한 그곳의 사람들, 훌륭한 교육제도, 때 묻지 않은 자연,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서두르는 법 없는 삶의 리듬이 말이다. (306)
생방송은 불가능했다. 조명 장치와 장소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완전히 아마추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삼십 분 동안 중단 없이 녹화를 하기로 했다. 카메라 작동이 멈추거나 조명이 꺼지지 않는 이상, 중단하고 다시 찍는 일은 없기로 정했던 것이다. 줄타기처럼 위험한 시도였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런 방식이 편했다. 하다가 멈추면 극적인 느낌과 흥분을 잃게 된다는 점이 싫었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초콜릿 무스가 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부풀어 올라야 할 사과 샬로트가 폭삭 주저앉는다거나 하는 상황 말이다. 요리의 비밀, 그리고 즐거움 중의 하나는 실패를 바로잡아가며 배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망친 요리를 고칠 수 없다는 것과, 그때에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17)
나는 당장 프랑스로 여행을 떠날 여유가 없을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고 폴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외교관 생활을 할 때 둘이서 항상 되뇌곤 했던 말이다.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즉, 직업이나 집안일에 치여 피곤하다는 핑계로 우정을 등한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사람 사이의 우정 역시 공들여 가꾸어나가야 할 그 무엇이었다. 폴과 나는 짐을 꾸렸다.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는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319)
심카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해냈고 굉장히 창조적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책을 쓰면서 나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 있었다. (336) ...... 직관적인 심카가 느릿느릿 철저하게 일을 해나가는 나를 못견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방법뿐이었다. 또 나는 한 가지 요리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히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만들면 맛있고 어떻게 하면 맛이 없어지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모두 알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책에 최종적으로 실린 요리법에는 의문점이 남아 있지않았다. (337)
나의 바람은 독자들이 <줄리아의 부엌에서>라는 책을 개인 요리 선생처럼 활용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각 요리법들을 강의식으로 구성해놓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또 그 책은 누구나 마음에 새겨야 하는 중요한 교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로 타고난 요리사는 없다는 것, 누구나 직접 만들어보면서 요리를 배운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요리를 배워라, 새로운 요리법을 시도해보라. 자신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라, 두려움을 떨쳐버려라,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요리하라!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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