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러한 결심을 리츠칼튼에서 함께 일하던 외국인 총조리장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집안 형님처럼, 학교 선배처럼 진지하고 성의있는 태도로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사실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말단직원이 까마득한 상사에게 답답한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조리장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가까이 다가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84)
그 사건 이후 나의 요리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매일 퇴근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내게 미국의 슈퍼마켓은 서울의 서점과 같은 의미였다. 수많은 치즈와 해산물, 다양한 육류와 가공식품들이 바로 살아 있는 요리책이었다. 아이쇼핑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는 그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모든 점원들이 나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수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살피던 그들도 나의 직업을 알게 된 후로는 웃으며 이해해주었다. (100)
한국의 주방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지거나 해고를 각오해야 할 만한 사태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요즘에는 한국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지만, 그래도 당시의 내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리장인 에릭이 그 젊은 친구의 이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106)
그날도 어김없이 사비에르는 5시를 좀 넘겨 출근을 했고, 나는 이미 대걸레를 들고 주방의 바닥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나는 밀치고 대걸레를 빼앗았다. 그때 그가 한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에드워드, 내가 있는 이유는 당신 같은 후배요리사들이 더욱 일에 정진하고 노력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네. 청소 같은 건 내게 맡기고 당신은 당신 할 일을 하라고." 기업으로 말하면 상무급 임원이 대걸레로 바닥 청소를 자청한 셈이다. 한국사회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111)
세계인을 상대로 우리 고유의 맛을 소개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내가 택한 방식은 세계인들을 한식으로 끌어들이기보다 한식을 자연스레 그들 가까이 놓아두는 것이다. 커다란 연회가 있을 때 전체 메뉴의 조화 속에 한두 가지의 한국음식을 꺼워넣어본다. 그리고 외국인들의 반응을 살피고 평가를 받는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들의 입맛에 통하는 한식의 맛을 찾아내고 그 식재료를 분석한다. 그 다음에는 한식의 식재료를 가지고 더욱 다양한 음식과 메뉴로 확산시켜 나간다. (127)
물론 오산이었다. 외국생활을 하는 동안 외국인들로부터 받아야 했던 상처보다 한국에서 받게 될 상처가 훨씬 크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일일이 찾아다니며 삼고초려를 해도 예전의 후배 밑에서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조리장은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요리사라는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만 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역시 오산이었다. (155)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출근을 했다. 총조리장이 새벽부터 웬 청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외국에서 일을 하면서 스스로 길들여진 것은 ‘남보다 한두 시간 먼저, 남보다 한두 시간 늦게‘라는 습관이다. 직위와 상관없이 늘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강박처럼 굳어진 것이다. ... "제가 부하직원들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잖아요. 그러니까 일도 더 많이 하고 더 열심히 해야죠. 사비에르라는 사람이 가르쳐줬습니다." (169)
외국생활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서구인들은 요리사에 대해 상당히 예의가 바르다. 두바이 역시 서구화된 문화권이라 그런지 왕조차 이렇듯 요리사에게 친절했다. 해외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음식만으로 요리사와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 당시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을 자주 찾던 스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피어스 브로스넌이다. 그는 항상 말쑥한 차림새와 재치 있는 유머로 나와 우리 직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답지 않게 상당히 겸손한 성격이었고, 요리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항상 셰프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할리우드 스타가 아니라 스타 셰프와 대화를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193)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한 호텔에서 2년 이상 근무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버즈 알 아랍처럼 아무리 무제한 계약이라 하더라도 몇 년쯤 일하다보면 직원들 눈치가 보인다. 따뜻한 자리라 해서 나 한 사람이 너무 오래 버티고 있으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10여 명의 다른 능력있는 인재들이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막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게을러지는 것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다. 모든 시스템, 동료들과 친해짐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easy going‘을 미리 견제하자는 것이다. (250)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얼굴을 맞대고 혹평을 하지 않는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인들은 요리가 만족스럽지 못했을 경우 다시는 그 식당에 가지 않지만 서양인들은 집으로 돌아가 장문의 컴플레인 메일을 써서 보내고 몇 달 후에 제대로 시정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식당을 찾는다. 요리사의 입장에서는 실로 무서운 충성도가 아닐 수 없다. (264)
마지막으로, 스스로 음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이는 단순히 배를 충분히 채웠다거나 맛있게 먹었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경험을 하고 갑니다"라는 뜻이다. 요리사는 손님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해주는 사람이다. 단순한 기술인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269)
"이미 말씀드렸듯이,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색깔이 아직 희미하고 성숙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꾸 그 색깔을 드러냄으로써 키워나가야 합니다. 세계시장에서는 튀지 않는 복지부동이 통하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으면 곧 도태됩니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려면 무언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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