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이야기보다 한결 시마무라가 뜻밖의 감동을 얻은 것은, 그녀가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고 따라서 잡기장이 벌써 열 권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래요>하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대답했으나 물끄러미 시마무라를 응시했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39)
그러나 요코는 얼핏 찌르듯 시마무라를 한번 보았을 뿐, 말없이 토방을 가로질러 갔다. 시마무라는 밖으로 나오고서도 요코의 눈길이 그의 이마 앞에서 타오르는 것 같아 어쩔 바를 몰랐다. 그건 마치 먼 등불처럼 차갑다. 왜냐면 시마무라는 기차 유리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야산의 등불이 그녀의 얼굴 저편으로 흘러 지나가고 등불과 눈동자가 서로 겹쳐져 확, 환해졌을 때, 뭐라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려왔던 어젯밤의 인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거울 속 가득 비친 눈 위에 떠 있던 고마코의 붉은 뺨도 생각났다. (51)
<올 가을, 악보로 연습한 거예요.> 간진초였다. 순간, 시마무라는 뺨에 소름이 돋을 듯 서늘해져서 뱃속까지 말갛게 되는 느낌이었다. 단숨에 텅 빈 머리 가득 샤미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그는 그저 놀랐다기보다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경건한 마음에 사로잡혔고 회한…의 상념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자신은 이제 무력할 뿐, 고마코의 힘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떠내려 가는 것을 기꺼워하며 몸을 던져 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63)
<이런 날은 소리가 달라요>하고 눈 온 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본 고마코가 말한 적이 있었다. 공기가 다른 것이다. 극장 벽도 없고 청중도 없고 도시의 먼지도 없어, 소리는 다만 깨끗한 겨울 아침을 맑게 지나며 멀리 눈 쌓인 산들까지 곧바로 울러 퍼졌다. (64)
<그래요, 나쁜 평이 일기라도 하면 좋은 마을에서 끝장이죠.>하고 말했으나 금방 얼굴을 들어 미소 지으며, <아니, 괜찮아요. 우린 어딜 가도 일할 수 있으니까.> 너무나 솔직하고 실감 어린 어조는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에겐 몹시 뜻밖이었다. <정말이에요. 어디서 벌건 다 마찬가지죠. 징징거릴 필요 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말투이지만, 시마무라는 여자의 속 깊은 울림을 들었다.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여자 뿐이니까.>하고 고마코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112)
<고마코가 밉다니, 어째서지?> <고마짱?>하고 곁에 있는 사람을 부루기라도 하듯 말하며 요코는 시마무라를 눈을 반짝이며 노려보았다. <고마짱을 잘 대해 주세요.> <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요코의 눈에 눈물이 넘쳐흐르더니, 다다미에 떨어진 작은 나방을 잡고는 흐느껴 울며, <고마짱은 제가 미쳐버릴 거래요.>하고 방을 뛰여나가고 말았다. 시마무라는 오한을 느꼈다. (119)
고마코가 시마무라 곁에서 달려나갔다. 고마코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린 것과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앗 하고 숨죽인 바로 그때였다. 물을 뒤집어쓴 타다 남은 시커먼 나무들이 어지러이 흩어진 속에서,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렸다. 요코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려 했다. 필사적으로 버티려는 얼굴 아래, 요코의 승천할 듯 멍한 얼굴이 늘어져 있었다. 고마코는 자신의 희생인지 형벌인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151)
정신없이 울부짓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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