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중환자실에서 눈을 뜬 그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괜한 내색은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을 다졌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혼신의 연기를 다했다. 몸에서 죽고자 하는 열망이 넘쳐났으므로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아마 구체적인 방법까지 염두에 두고 병실에 누워서 마지막 순간을 건뎠으리라.
......
죽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오히려 살고자 하는 열망처럼 보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나간 사람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19)

억울한 한 죽음이 있었고,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도저히 어떠한 책망이 불가능한, 피칠갑한 모습의 잔혹한 죽음이었다. 우리는 이 생명들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얽힌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서도, 실은 어떤 죽음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
우리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죽음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도. (43)

자대로 복귀해야 했다. 그의 부모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러자, 했다. 그러고 생각했다. 차에 오르면 휴가는 끝난다. 자유도 그로 인해 끝난다. 이제부터는 다시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한 겹의 모포 위에서 어두운 천장을 보며 잠이 들 것이다. 눈을 떠도 어둡고, 눈을 감아도 어두운 날일 것이다. 이제부터 무한히 펼쳐질 깜깜하고 또 깜깜한 밤들. 갑자기 숨이 턱밑에 닿았다. 자유, 자유롭고 싶다. 절망적인 밤은 더이상 하루도 보내기 싫다. (114)

"제가 볼 때는 70세 노인이 두 다리가 전부 잘리고도 쇼크 없이 살아 있는 게 기적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기적은, 잘린 두 다리를 병원에서 전부 붙여서 아버지가 다시 거어나오는 게 기적이란 말입니다!"
나는 기적에 대한 이견과 난상을 듣고 생각했다. 기적은 그가 처음부터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지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가 살아갈 의지를 얻어 지하철 역 따위는 기웃거리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었을까. (149)

그렇다. 이 중위 군의관은 자기에게 부과된 신성한 진료의 의무를 환자들에게 오롯이 떠맡겨버린 것이었다. 이곳은 마치 환자들의 자치구인 것처럼 환자들끼리 서로 진료를 보거나 혹은 직접 자기가 스스로 진료를 보는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진료도구도 사용할 수 있었고, 의무실에서 사용가능한 범위까지 처방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였기 때문에 더욱 바빴다. 나는 우리 분대 재활의학과 전문의의 기관지염을 진단하고 유려한 의학용어로 차트에 기록했으며, 성형외과 전문의의 목감기도 하나 차트에 기록했고, 내 증상에 관해 기수라고 진단해 내가 먹을 약을 내 차트에 잔뜩 써냈다. 그렇게 자가진료를 마친 환자들이, 자기 차트를 들고 길게 `나래비`를 서서 한 명의 공식적인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220)

하지만 가계를 책임진 가장의 본능으로, 그간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왔던 남편으로, 아내를 안심시키고자 무슨 말이든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허우적거리며 무슨 말이든 내뱉을수록, 우리는 더욱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우리에게 불행이 눈덩이처럼 굴러가는 소리로 들렸으니까. 그리고 그 소리는 고요한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고 그가 눈시울이 붉어져 아무 말에도 대답하지 않는 아내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 계속되어,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마음을 슬픔으로 긁어댔으니까. (278)

그 광경을 보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춥고 어두운 세상에서 시신이 되어 치워지는 사람들도 이 눈을 보고 있을까.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주말엔 쉬어야겠어. 정말, 다시는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푹 쉬는 거야. 절대로 다시 오지 않을 휴가를 받은 것처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주말을 보낼 거야. 주말이 지나면, 왠지 예쁜 첫눈이 올 것 같으니까. 그리고 곧 내 몸 위에 소복하게 쌓이겠지. 고요하고도 안온하게. 그렇게 된다면 참 포근할 것 같아. 나는 움츠리지도 않고, 그리 외롭지도 않게 잘 쉬고 간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 (282)

발표를 다 마치자 과장님은 가정폭력 신고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워낙 빈번한 폭력이고, 아이가 거의 다 큰데다가, 어머니도 같이 있어 언제든 신고가 가능할 것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결국 신고를 누락한 죄로 문책당했다. 그리고 과장님은 마지막에 온 좀비들의 눈에 들어간 화학약품의 정확한 성분을 물었다. 나는 그런 것까지 파악할 겨를이 없었기에 결국 다시 꾸중을 들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지탄받아야 했다. 이것이 지난날 당직의 성적표였다.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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