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오다이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가톨릭세력과 행보를 같이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가톨릭세력이 프랑스 인도차이나 식민통치의 첨병역할을 하고 1954년 이후에는 남베트남 응오딘디엠... 독재정권의 버팀목이 되어준 동안에 까오다이는 불교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양대 종교세력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핏줄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31)
호찌민이 항상 틀렸다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옳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도 인간이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오에 대한 평가 없이 호찌민 사후 그에 대한 베트남식 영웅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과오가 묻혀버리고 재생산되었다는 데 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과 군사적 지배, 라오스에 대한 군사적 개입, 경제정책의 실패와 외교정책의 실패. 베트남 공산주의식 관료주의와 군사주의의 만연 등은 주변여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남긴 과오의 재생산일 뿐이었다. 언젠가 그것이 이 위대한 혁명가의 모든 공을 덮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 한 사람을 또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42)
또 하나, 쯔놈시로 유명한 여류시인 호쑤언흐엉...의 시조 한수.
금침...을 덮는 년과 추위에 떠는 년이 있으니, 시팔, 첩의 운명이다. 열 번 중에 다섯 번도 있을까 말까, 한 달에 두 번도 있으나마나. 매를 견디며 먹으려 하나 밥은 쉬었고 머슴살이와 같으나 새경을 주지 않는 머슴이구나. 이 몸이 이 길을 알았다면, 관두고 혼자 살았을 것을.
<첩살이>란 제목이 붙은 시이다. 강퍅한 여성의 처지를 단숨에 씹어뱉는 호기가 절로 느껴진다. (126)
5월에서 10월까지 계속되는 우기가 끝난 후인 1월은 건기이기는 해도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전으로 우리의 가을처럼 좋은 계절이다. 이때에 똔레삽 호수의 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원래 호숫가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달리 전통음식인 쁘라혹(Prahok)을 만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리얼(riel)이라는 물고기를 잡아 우리의 젓갈과 유사한 생선발효식품을 만든다. 쁘라혹이 크메르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음식인가는 캄보디아의 화폐단위가 리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14)
근현대사가 진행되는 동안 라오스는 전쟁의 소요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청해 전쟁에 뛰어들거나 앞서서 전쟁을 일으킨 적도 없다. 혁명을 했지만 혁명 뒤에 늘 따라오게 마련인 `피바다`에 주체를 못할 만큼 몸을 적시지도 않았다. 예컨대 공산주의정권이 들어서고 승려에 대한 시주를 금지했지만 불교신자들의 불만이 늘자 이내 쌀의 시주를 허용했던 것이 라오스였다. 덕분에 승려들은 절의 텃밭을 직접 일구면서 반찬만 스스로 알아서 해결했다. 사원에서 승려들을 모조리 몰아낸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와는 달리 라오스는 공산주의와 불교가 오래 전부터 그럭저럭 양립하는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288)
왕파오의 몽족군은 CIA와 미군 특수부대에게 훈련을 받았고, 병력 수는 1961년에 9천여명, 1969년에는 5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CIA와 미군의 비밀작전에 동원되어 빠뎃라오와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그 격전지는 북동부의 후아판지역과 시엥쿠앙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미군의 맹폭지역임은 앞서 말한 바 있다. CIA가 나서 벌인 이 전쟁은 비밀전쟁이었으므로 미군은 전쟁 후 인도차이나에서 발을 빼면서 자신들이 훈련시키고 끌어들였던 몽족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미국이 물러난 후 위기의식을 느낀 왕파오는 라오스를 떠날 것을 결정하고 태국 우돈의 CIA지부를 찾아가 몽족군 모두를 새로운 정착지로 철수시켜줄 것을 요구했지만 CIA는 C-130 수송기 한 대만을 보냈다. 1만명 이상이 몽족군의 거점이었던 롱첸으로 모여들지만 CIA는 사흘 동안 고작 1천여명만을 태국의 난민캠프로 수송하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러나 몽족의 엑소더스는 줄을 이어 산악지대의 능선을 걷고 메콩강을 건너고 태국 국경을 넘어 난민촌에 수용된 수는 1978년까지 5만여명을 넘었다. (3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