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끼엔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끼엔에게도 한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마음과 외양, 끼엔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직 전쟁의 폭력과 야만에 훼손되기 전의 시절, 욕망과 도취와 열정으로 가슴에 거품이 가득 일던 시절, 어리석을 만큼 무모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의 고통으로, 질투와 회환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던, 지금의 저들처럼 사랑스럽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아아! 전쟁이란 집도 없고 출구도 없이 가련하게 떠도는 거대한 표류의 세계이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단절과 무감각을 강요하는 비탄의 세계인 것이다. 끼엔에게는 자기의 영혼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을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젊은 부대원들만큼은 반드시 일상의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아직 남아 있는 사랑의 마지막 한방울이라도 누려야 했다. 내일이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이니. (47)
"그래, 곧 전쟁터로 간다지? 내 너를 말릴 생각은 없다. 난 이미 늙었고 넌 아직 젊은데 네 의지를 어찌 꺾을 수 있겠느냐. 다만 내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살아가는 것이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삶의 여러 가지를 두루 경험하는 것이지 거부하는 게 아니야.... 네게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충고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네가 죽음으로써 무언가를 보여 주려는 인간의 모든 유혹을 경계하길 바란다. ..." 놀라웠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끼엔은 의붓아버지의 말에서 신의를 느꼈다. ... 그리고 문득 왜 어머니가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이 여린 남자에게 갔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80)
"네 어머니와 나의 시대는 끝났다. 아들아... 지금부터 넌 혼자다.... 최선을 다해 네 시대를 살아가야 해. 이제 곧 새 시대가 올 거야. 눈부시게 아름답고 멋진 시대가.... 커다란 불행 같은 건 없을 게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슬픔이란 것은 사라지지 않겠지.... 여전히 슬픔은 남을 거야.... 슬픔은 대를 이어 계속되겠지. 아버지가 네가 남겨 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구나. 슬픔이란 것밖에는...." 아버지는 그림조차 남겨 주지 않았다. 평생 동안 쉬지 않고 그리고 또 그렸던 소중한 보물들을 몽땅 불태워 버렸다. 죽음의 신이 저승길을 재촉하는 것을 예감한 어느 날 밤, 아버지는 당신의 그림을 한 점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불태웠다. ... 인생의 소중한 세월을 한참 더 흘려보내고 나서야 끼엔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담겨 있던 고통과 괴로움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중요한 말을 남기고 싶어 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168)
베트남-미국 전쟁에서 나는 그와 같았고, 평범한 병사들과 같았다. 같은 운명으로 수많은 우여곡절, 승리와 패배, 행복과 고통, 잃은 것과 남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들 개개인은 전쟁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되었다.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개별적인 전쟁을 시작한 날부터 공통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싸움을 따로 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해, 전쟁 시절에 대해 가슴 깊은 곳의 인식이 지극히 달랐으며, 당연히 전후의 운명이 제각각 달랐다. 우리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전쟁에 쫓고 쫓기는 심각한 과정 속에서, 서로 완전히 같아 보이는 환경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324)
그러나 우리는 같은 슬픔, 전쟁의 거대한 슬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행복보다 고귀한, 고상한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슬픔 덕에 우리는 전쟁을 벗어날 수 있었고, 만성적인 살육의 광경, 무기를 손에 쥔 괴로운 광경, 캄캄한 머릿속, 폭력과 폭행의 정신적 후유증에 매몰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고 죄악이 가득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길이다. 왜냐하면 평화로운 시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것이 작가가 작품에서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라. (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