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
아유 우타미 지음, 전태현 옮김 / 청년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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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 갔다. 왜냐하면 위스의 어머니가 3년 동안 다시 아이를 갖기 않았기 대문이다. 그러나 위스는 종종 그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덜미 뒤편에서 들려오는 갓난아기들과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 뒤편에 있는 생생한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만약 그 소리들이 그의 앞 방향에서 들려오면 그것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 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밤 아니면 낮에, 아침 아니면 저녁에 가끔씩 나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스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만나는 그 남자와 아기들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한 번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존재들에, 얼굴도 모르는 존재들에. (84)

천구의 불을 껐을 때 그는 뭔가를 느꼈다. 그건 사람의 목소리도 물체의 소리도 아니었다. 본능적인 육감으로 그는 방안에, 그의 가까이에 사람이 있음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불안함을 감지하고 손가락으로 더듬어 불을 켰다. 그러나 밝아진 방 안에 딴 사람은 없었다. 도둑이나 강도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목덜미 뒤쪽에서 들렸다. 그의 목과 어깨에 뜨거운 입김이 느껴져 그 주위 살갖에 경련이 일었다. "너...... 내 동생이니?" (97)

때때로 소녀는 자신만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중얼거림 때문에 위스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곤 했다. 그러면 위스는 싱긋 웃고는 소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비록 그가 소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위스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어조와 억양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이 마주 바라보게 되면서 서서히 위스는 자신이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녀를 바라볼 때면 문득 어떤 슬픔 가운데 묘하게 찾아오는 사랑을 느끼곤 했다. (117)

"이젠 중국 놈들이 우릴 지배하려 드는 겁니다. 그들이 우리 원주민들을 가난한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단 말입니다." 위스는 이들의 참담한 고통이 복잡미묘한 분노로 바뀌고 이제는 아예 갈피를 못 잡는 의심으로까지 발전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문득 건축 자재를 구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준 콩텍 씨가 생각났다. 그리고 마을에 취재를 왔던 중국계 기자 두 명도. 중국계는 여권이나 주민증을 받으려면 돈이 더 많이 들었다. 위스는 안손의 논리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위스는 그의 말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잠깐만, 안손!" (144)

그는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머리만 하게 작아진 것을 느꼈다. 머리 크기만 했다. 몸은 없었다. 머리 밖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손가락도 없었다. 심장도 없었다. 컴컴했다. 이게 밤의 색깔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자궁 안에 있는 것인가? 따뜻하고 물이 흥건했다. 그리고 별똥별이 하나 떨어지는 빛이 보였다.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별똥별 또는 유성이 아니었다. 찢어진 양막의 천장이었다. 그는 물의 소용돌이와 부글거리는 거품 속으로 휩쓸렸다. 그리고 양막의 천장이 완전히 찢어지면서 처음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산처럼 솟은 두 젖가슴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 그다음으로 그가 본 것은 수백 종에 이르는 수천 마리의 무서운 뱀과 귀신, 악령들의 은신처가 된 대나무 숲과 우거진 나무숲이었다. 숲은 멀어질수록 점점 아득해졌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하늘나라 별님나라......." (160)

"형은 빨리 회복되실 거예요. 신께서 형을 몇 번이나 구해주셨잖아요." 그는 떠나기 전에 위스의 팔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야, 안손, 신은 없어. 신이 있다면, 왜 우삐를 구해 주시지 않았겠어....... (168)

마지막 날 밤 분홍빛 달 밑에서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찻숟가락으로 그것을 찢어 버렸다. 흡사 붉은 거미집 같았다. 나는 그것을 은으로 된 즈파라 상자에 넣어 개한테 던져 주었다. 그 개는 물론 나와 거인 사이를 오가는 밀사였다. (188)

그리하여 나는 비자 신청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나의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요즈음 점점 많은 자바 인이 네덜란드 인들을 흉내 내고 있다.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행복과 행운을 기대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준다. 얼마나 비뚤어진 짓인가. 얼마나 덜떨어진 짓인가. (207)

야스민,
너는 그 이야기가 수세기 동안 여성들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을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르니? 누구나 섹스에 대한 공포 속에 살고 있지만, 남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여성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거야.
하지만, 그래, 너는 나를 유혹했어.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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