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맥락에서, 수카르노는 서로 다른 정치사상 조류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지도자의 스타일과 수사를 발전시켰다. 1921년 <우투산 힌디아>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비슈누 무르티는 어디서나 [인민의] 각성을 불러온다. 자본주의를, 그 노예인 제국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라! 신은 이슬람에게 성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셨다".... 이렇듯 수카르노는 민족주의 이슬람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종합`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당...을 창설했으며, 이는 이후 반식민주의를 추동하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혼합은 1970년 수카르노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정치 전략의 특징이 되었다. (28)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억압적인 체제 중 하나인 수하르토 장군의 군사독재가 3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서구 열강의 자비 덕분이었다.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는 오랫동안 서구 자본가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같은 이들의 기관에 의해 `모범생`으로 여겨졌다. 필거가 표현했듯이 "아시아의 세계화는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무차별 학살 속에서 탄생했다".... 이 시기에 세계은행은 3백억 달러가 넘는 돈을 수하르토 체제에 제공했는데, 세계은행의 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중 20-30퍼센트가 수하르토와 그의 친인척 명의의 금고로 들어갔다고 한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수하르토 독재 체제가 인도네시아에 `안정`을 가져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마거릿 대처는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최고의 친구 중 하나"라고 불렀다. (38)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비교하는 능력은 사라졌다. 창의성은 불신되고 붕괴되었으며, 다양성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해외여행도 경제 정치 엘리트들이나 누릴 수 있었는데, 이는 신질서 시기든 신질서 이후 시기든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인도네시아 사회는 붕괴했다. 대다수 인도네시아 인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안전한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운 비참한 환경에서, 하루에 미화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런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현실에 안주했고, 언론은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46)
이 작업을 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프람은 쉽게 지쳤고, 종종 같은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화를 내고 좌절했다. 때로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인도네시아에 걸었던 모든 희망이 무너진 듯했다. 한번은 그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주의가, 현재 인도네시아 인 엘리트가 무자비하게 저지르는 약탈보다 나았다고 단언했다. 내가 그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나라의 창시자 중 한 명이자, 식민주의를 경멸하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람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 광활한 군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바주의`와 자바 제국주의가 외국 식민 지배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는 것이다. (53)
그렇다면 식민주의가 사람들에게 권력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도록 가르친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그건 이미 인도네시아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자바주의에는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원칙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식민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1965년 이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려면 반드시 자바주의를 이해해야 합니다. (63)
`자바 파시즘`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자바주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윗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바가 수 세기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겁니다. 자바 엘리트들은 향료를 찾던 식민주의 세력과 협력했죠. 사람들은 엘리트에게도, 식민주의자들에게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식민주의 초기부터 엘리트들은 식민지 세력에게 매수되었고, 자바는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적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윗사람들에게는 윤리라는 게 없었고,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99)
왜 인도네시아에서는 지적 호기심이 사라진 걸까요? 다른 독재 체제들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들이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과 잡지를 찍어 내 몰래 배포했습니다. 많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민은 진실에 목말라 했고, 그 결과 종종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도 했죠. 왜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인도네시아 인들은 이 나라의 과거에 대해, 세계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정치적 사회적 체제에 대해, 혹은 동티모르와 아체, 파푸아 등에서 일어난 잔혹 행위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는 겁니까? (118)
수하르토와 그 체제에는 이상주의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화가 그저 하찮은 오락 수준으로 퇴화하고, 결국에는 믿을 수 없이 천박해져서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은 배울 게 전혀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모든 게 공허해졌어요. 인도네시아 인들은 거짓된 것을 억지로 주입받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많은 영웅들을 보여 주는데, 사실 이 나라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수 세기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영웅이 있다는 겁니까? 무하마드 야민, 아르코, 티르토와 같이 이 민족을 발전시키려 노력한 진정한 영웅은 우리 역사책에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120)
이곳은 상황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경험은 나와 달라요. 나는 삶의 대부분을 싸우면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지배에 맞서 싸웠고, 나중에는 수카르노의 혁명을위해 싸웠죠. `국가와 국민성 건설`이라는 문제에 깊이 관여했어요. 바로 그런 게 지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도 국가와 국민성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국민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해요.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글이나 써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깨달았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렸죠. (127)
그러나 인도네시아에도 선생님이 존중하는 지역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전부 부패해 가는 건 아닙니다. 아체는 예외입니다! 인도네시아가 2백 년간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았을 때도, 아체는 독립을 유지한 채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개인주의자들이죠. 네덜란드는 아체를 점령하기 위해 자바에서 암살자들을 보냈는데, 지금 인도네시아 정부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항상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체를, 그들의 개인주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해 온 겁니다. 아체 인들은 용감합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용감해야 한다고 배우죠. (154)
사라진 책들 중 적어도 일부라도 다시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책은 한 번만 쓸 수 있는 거에요. 책을 쓰는 동안 작가가 빠져드는 주변 환경과 기분은 다시 만들어질 수 없죠. (135)
1998년 수하르토의 몰락을 취재하면서, 당시 학생 시위의 본부였던 트리삭티 대학에 갔습니다. 한 가지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학생 지도자들이 수하르토 정부와 이른바 `정실주의`에 대해서만 반기를 들었을 뿐, 퇴행적 문화, 억압적인 가족 구조, 시민들의 일상에 대한 종교의 개입, 심지어 억압적인 정치 경제구조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상황은 학생들이 문화 사회 정체체제 전반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1968년의 파리나 멕시코시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게 이른바 `개혁`이라는 건데, 이건 수하르토의 신질서를 개량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신질서를 개혁해 봤자 발전된 형태의 신질서를 만들어 낼 뿐이겠죠. 이는 진정한 혁명과는 무관합니다. (170)
앞의 질문과 연결해 생각했을 때, 인도네시아가 이 거대한 체제에 홀로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봅니까? 인도네시아가 자체의 혁명을 할 수 있습니다만, 전 세계적인 경제적 정치적 독재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 정부와 엘리트가 신뢰할 만하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가 세계적 권력에 맞서 싸우는 국가적 단결을 이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누구든 뇌물을 주는 쪽에 섭니다. 그게 인도네시아의 현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혁명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야 세계적 투쟁을 위한 동맹을 찾아볼 수 있겠죠. (173)
인도네시아가 1945년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많이 손상되어서, 어떤 개혁도 효과가 없어요. 모든 행정 권력은 골카르의 손에 있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는 건 모두 훔쳐서 외국에 팔아넘기는 군부와 엘리트가 실권을 장악한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뭘 해낼 수 있겠어요? 답은 혁명입니다. 총체적 혁명!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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