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싸얼 왕 세계신화총서 12
아라이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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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말떼와 편안하고 아름다운 가마를 든 사절단은 그를 스쳐 언덕으로 내달렸다. 탕둥제부는 말떼가 일으키는 먼지와 말에 올라탄 용사들의 날카로운 외침에 묻혀버렸다. 먼지가 모두 흩어졌을 때는 말떼가 이미 먼 곳으로 달려간 뒤였다. 탕둥제부는 또다시 노래를 불렀고, 그제야 성채 회의실에서 모든 일을 끝마친 노총관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 상사는 성채를 등지고 떠나려고 했다.
노총관은 뒤를 쫓아가는 대신 오래된 찬사를 읊었다. ......
상사는 다시 몸을 돌려 성체의 장엄한 대문 앞에 선 노총관을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인연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인연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60)

노인은 꾸러미를 등에 지고 육현금을 품에 안고 말했다.
"보게나. 이 이야기에 또 새로운 가지가 생겨나려는 모양이네. 젊은이, 내가 길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으면, 돌아와 자네 이야기를 들을걸세." 이 말을 마치고 늙은 이야기꾼은 곧 길을 떠났다. 희미한 달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시여, 왜 도무지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시고, 우리처럼 운명이 비천한 사람들을 사방으로 떠돌게 하십니까?" (135)

또렷한 흰빛의 눈꽃 같은 것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 흩날리며 내렸다. 진메이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야기, 그 방향은 이미 정해졌노라. 하지만 이제 차이가 있으리라."
"왜죠?"
한바탕 웃음소리가 광풍처럼 그 눈꽃들을 뒤흔들고 빙글빙글 맴돌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보는 법이지." (137)

진메이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늘이 이미 거싸얼의 영웅 이야기를 인간세상에 묻어두고, 후대 사람들이 끊임없이 발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숨어 있는 불경, 즉 복장이라 불린다. 어떤 복장은 종이에 쓰여 땅 아래 묻힌 채 인연이 있는 사람이 캐주기를 기다리지만, 더 많은 복장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감추어졌기 때문에 심장 또는 식장이라 불린다. 그것은 인연이 닿는 때에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 흘러나와 점차 드러나기 시작해 세상에 새롭게 전해지는 것이다. (190)

결국 마지막으로 있던 장면조차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신에게 가르침을 전했던 그 활불의 말을 떠올렸다. "바깥을 보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오.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있을 것이니, 그것이 샘이라고 상상하면,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날 것이오."
진메이는 모든 의식을 집중해 내면의 어둠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갯속을 걷는 여행자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눈앞은 흐릿하고 또 흐릿하기만 했다. (388)

노인이 웃었다. "난 자네라는 중컨이 좋아졌네. 자네는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에 의문을 품을 줄 아는군. 뭐든지 아는 척하지 않고 말이야,"
"어르신도 그저 대장장이 같지는 않으십니다." (395)

차오퉁에게 지친 국왕이 말했다.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입과 머릿속에 있는 것이오. 아구둔바 그 사람은 이야기를 전하는 모든 사람의 입과 머릿속에 살고 있는 셈인데, 이런 사람을 어찌 잡을 수 있겠소. 더이상 시간 낭비 하지 마시오."
차오퉁은 지주, 귀족, 승려 등을 공경하지 않는 아구둔바를 잡아들임으로써 국왕과 좀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아구둔바는 이야기라는 그럴싸한 은신처를 찾아내어, 스스로 두 다리를 움직일 필요도 없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차오퉁은 하릴없이 포기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481)

"저는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아직 하지 않은 일까지도 모두 이야기했지요. 링 국에서 하늘세계로 돌아간 부분까지요."
거싸얼이 진메이의 팔뚝을 잡았다. "내게 말해주게. 하늘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또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가? 자라 왕자가 새 국왕이 되는가?"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490)

자라는 타고 있던 말과 함께 하늘로 들어올려졌다. 아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의 투구 위에 달린 붉은 술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다. 자차셰가는 아들의 귓가에 세 가지 말을 남겼다.
첫째는 "신바마이루찌는 링 국의 영웅책에 들어갈 것이다"였고,
둘째는 "내 아우 거싸얼 왕이 링 국을 강성하게 이끌어준 것에 감사한다!"였으며
마지막은 "내 아들이 올곧은 영웅이라 하늘에 있는 내 영혼에 위로가 되는구나!"였다.
그러고 나서 자차셰가의 모습은 다시 서서히 사라졌다. (548)

거싸얼이 말했다. "그대가 죽음을 앞두고 이처럼 선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겠다. 그대의 죄는 지옥에서 벌을 받아 마땅하나 그만두기로 하지. 그대의 영혼이 청정한 부처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다. 가라!"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손바닥 한가운데서 한줄기 강한 빛이 뻗어나가더니 위쩌둔바의 육신을 맞혀 쓰러뜨렸다. 위쩌둔바의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열반에 들어 시름도 즐거움도 없고, 욕망도 잡념도 없는 정토로 갔다. (638)

마지막이 진메이는 거싸얼 앞에 섰다. ... 조각상을 앞에 두고 진메이는 마음이 심란해져 외마디소리를 내질렀다.
"대왕이여!"

이때 마침 거싸얼은 장가페이부를 타고 왕성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었다. 그는 마치 이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거싸얼은 말 잔등 위에서 몸을 곧게 폈다. 이때 더욱더 진실하고 간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운명, 내 왕이여!"
거싸얼은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그 사람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하여 온 정신을 기울여 소리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 거싸얼은 진메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줄곧 이야기의 마지막 결말을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그때입니다."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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