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식 

  • 혁명은 왜 어느 순간 변질되기 시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는가?
  • 혁명 시대 이후 도래한 풍요로운 도시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 혁명의 비할 데 없는 장점, 아름다움--즉 자유의 추구, 활기, 창의성, 고양된 정치의식과 소통, 희망, 변질된 혁명이 아니라--을 어찌 다 훨훨 망각하고 스스로 독재자의 노예 & 물질의 노예가 되나?
  • 한 사회가 감당하려 하는 무질서의 량을 높이지 않으면. 혁명은 그저 고통만을 주는 무질서로 기억되고 사람들은 질서를 찾아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임. 안락한 삶 속에서 정치의식이 거세된 자들. 자신과 판박인 또 다른 자신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새로운 경험이란 없는. 우리는 같다라는 공동체 의식은 단단한.  
  • 무질서, 다름, 고유한 것에 대한 이해는 당연히 편치 않고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움. 이것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이 대면의 힘을 어떻게 유지하고 길러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모든 혁명은 전제군주와 노예제의 귀환으로 끝맺게 될 것  
  • 도시의 풍요를 자발적인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누릴 수는 없겠는가? 


배경

  • 자발적 노예됨에 대한 연구 by 에리히 프롬과 한나 아렌트
  • 그러나 세넷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공동체 생활"과 청소년기의 형성력에 주목함 > 이 둘이 합쳐져 도시에서만 가능한 자발적 노예상태가 빚어진다고 봄

1부 새로운 청교도주의 

1장/ 순수한 정체성
  • 혁명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순수의 추구(결국은 이들이 혁명을 말아 먹음)는 청소년기의 특징임
  • 청소년기의 '정체성의 위기' : 능력은 남아도는데 경험은 없음. 자신이라는 재료를 어떻게 쓸지를 모름--경험 없으니. 그런데 일생을 좌우할 큰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느낌. 경험이 필요하지만 경험에 의해 다치고 싶지 않음. 이상을 추구함.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서 순수한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경험을 피하면서 경험을 처리함. 나는 다 알고 있다, 나는 그 의미를 안다, 경험 안 했지만 그 결과는 안다, 고 착각함 
  • 에릭슨이 만든 '정체성의 위기'의 본래 의미 역시 청소년기의 단순 방황이 아니라 그 시기의 사고 방식이 전체 인생에서 갖게 되는 윤리/가치의 측면을 말한 것임. 경험을 생략한 채 이상/순수/단일성에 사로잡힌 자는 이 세계의 구체성을 대면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자발적으로 상실함. 종교공동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임. 내가 행한 구체적 행동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는 죄인이다' 이런 추상적 언어로 얼버무리고 고통 받는 채하지만 실은 맘 편하게 살아감


2장/ 순수한 공동체라는 신화 

  • 1장의 청소년기의 순수성 추구가 베버가 연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고스란히 겹침. 프로테스탄트들은 경험의 모조품으로 경험에 앞서는 공동체를 상상함. 이는 구체적 너와 내가 어떠냐와는 상관 없음. 이 공동체라는 상상된 단일성 아래 서로를 지켜보고 감시하고 독려함
  • 이런 공동체에서 일탈자에게는 당연히 억압이 주어짐. 그러나 이 억압은 공동체 내에 있는 이들에게 이미 작용하고 있는 억압임. 다름이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느라 놀라거나 상처 받는 것을 미리 차단함. 다름에 대해 사고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사양함. 이 불안. 이 공포. 필연적으로 공동체, 다시 말해 순수한 단일 공동체라는 신화를 고수하는 사회는 양극화되고 폭력사태로까지 이름
  •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 풍요라는 경제적인 환경은 순수성, 일관성을 향한 더 큰 충동이라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
  • 19-20세기 미국 도시: 각종 이민자 그룹들 뒤섞여 있고 다들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어느 그룹도 다른 그룹들을 배제하고 경계를 막아버릴 만큼 강하지 못했고, 물질적 궁핍으로 물자 나눠 써야 했으며, 접촉면을 늘려서 먹고 살 기회를 늘려야 했다 > 그 결과 엄청난 다양성과 활기가 도시를 채웠음
  • 오늘날 부를 쌓은 도시: 1) 돈으로 공동체의 경계와 내부구성을 통제할 수 있다 (이제는 순수라는 신화를 실현할 돈이 생겼으니)  2) 가정이 신성시되고 가족이 완전 딴딴하게 결합해 (예전엔 밥만 먹으면 밖에 나가 일하고 퇴근하면 이웃들과 이야기하고 놀고 최소한 교회라도 가야 했지만)  3) 물질 공유의 필요성 없어니지 단절 자연스러워. 자동차도 전자렌지도 다 집에 있으니 나눠 쓸 일 없어. 현실의 만남은 희박해지고 동일성에 대한 상상만 깊어짐
  • 즉 풍요로운 도시에서 가정과 공동체는 모두 자가격리로 나아감 --> 이 부분은 3장에서 처리       


3장/ 도시는 어떻게 신화를 되살리는가

  • 20세기 전반기의 도시는: 가난하고, 다양하고, 활기차고. 가정이 큰 기능 하지 않았고 집 밖에서 삶의 아주 많은 부분을 보내야 했음
  • 2차대전 이후 도시는: 부유해지고, 가정이 사회가 하던 여러 기능 갖고 들어와 꽁꽁 문을 닫고--다시 말해 사회적 접촉점이 급속히 줄어들고, 가족끼리는 친구같아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 생기고. 특히 중산층이 교외로 이동하면서 이 현상은 더 심해. 교외의 고립된 환경, 고립된, 섬 같은. 가정에 대한 의존도, 신화를 더 강화시켜  
  • 그럼 청소년기의 특수심리와 도시의 공동체는 어떻게 연결되나: "이런 강화된 가족 생활은 청소년기의 두려움을 현대 도시의 사회 생활로 주입하는 대리인, 즉 '중개인'이다. 강화된 가족은 앞 장에서 설명한 공통의 유대라는 신화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한다. 강화된 가족은 그 가정의 개인들뿐만 아니라 가족들로 이뤄진 공동체 전체까지 정체성을 순수화하는 저 청소년기의 의례에 고정하는 매개물이다." (105)
  • 중산층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점잖은' / '점잖아진' 노동 계층도 달팽이처럼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상황.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노는 게 아니라 자기 집 거실과 마당에서 가족들과 노는
  • 물론 지난 시대의 무법시대(대빵을 중심으로 뭉친 공동체들이 불법으로 얻은 이익을 서열에 따라 나누어 먹는. 좋게 말하면 대표 중심의 조직정치^^)나 슬럼가를 낭만화하는 것이 아님. 그러나 당시의 무질서를 우리가 어떻게 없앴는지를 봐야 함. 그 길은 관료주의 체제였음. 이로써 무질서는 잦아들었지만 치명적인 대가 치뤘음: 정치의식이 거세된 동일화된 인간들 등장, 나와서 나누고 다투는 장을 잃고, 가정에 매달리는데 사회의 불법과 부패에 대한 피난처/섬으로서의 가정이라서 가정 내 갈등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매달려. 가정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 때문에, 라고 말하며 모험을 피하고 다른 것을 배척해.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고. 교외의 가정은 기능적인 단순성을 위해 순수해진 공간으로 남고


4장/ 순수한 도시를 계획하기 

  • 경험에 앞서는 이상/순수를 미리 세우고 경험을 회피하는 일, 경험을 그 순수에 끼어 맞추는 일, 바로 현대 도시의 건설 자체가 그러해
  • 파리를 설계한 오스만: 구체적인 것들의 경험에 따르는 용도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하나를 미리 계획해 둠--설계. 이미 있는 전체, 표준, 예측 수요. 도시는 미리 가져온 미래, 미래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공간 소유 못하고 > 2차대전 이후 이 '대도시 계획'은 압도적인 신뢰 얻고 도시는 이렇게 하나의 순수, 하나의 전체(미래를 이미 결정하고 구체로서의 개인은 생략해 버리는)로서 설계됨. 인간은 부품이 되고, 누가 어디서 살며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도 이미 결정되고. 살아있는 인간들의 경험에 앞서서 예정되어 버린 조화. 그로부터 실제 빚어지는 것은 정처 없는 방황 아니면 권위주의적 지휘 > 이 둘 사이의 중도는 둘의 타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함 
  • "왜 유독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람직한 가치로 꼽는 것인가? 전체가 효율을 극대화하게끔 기능하는 것이 부품들의 수명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은 기계 설계에서는 타당하지만, 어떻게 인간사에서도 이런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서로를 상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에서 벗어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에 존재한 것과는 다른 양상과 방향의 관계를 만들도록 장려해야 하는 것이다."
  • 순수의 추구=통제할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 > 갈등은 무조건 폭력으로 비화된다고 가정되고, 실제 갈등을 비폭력적 방법으로 풀어본 경험도 고민도 없으니, 실제로 갈등은 거의 매번 폭력이 되어 버려 > 경험은 기계부품에게는 치명적--닳아 없어지고 기계는 멈추니까, 그러나 인간은 경험이 없으면 아예 성장을 못해. 그러니 늘 청소년기에 머무는 것


2부 새로운 아나키즘

도시를 떠나 다시 농촌, 또는 슬럼 또는 가난한 단순사회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풍부하게 하는 데 도시의 풍요를 이용하자. 

어떻게? >도시 경계 안에서 새로운 혼란--아나키--를 만들어내기 > 파괴하는 아나키 아니라 사람을 풍부하고 성숙케 하는 아나키


5장/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 청소년이 자기 힘을 활용할 기회를 가지고 그 힘을 써서 필연적으로 맛보게 되는 따끔한 실패. 이 실패가 정말 중요해. 이 실패를 통해 순수로부터 탈출이 가능해. 실패하고 나면 궁금해져.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가 겪은 일은 구체적으로 뭔가, 심지어 적은 정말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해져.
  • 이렇게 스스로 힘을 써볼 기회조차 없었으면 평생 거기에 고착되어 내가 힘만 쓸 수 있었으면 내 인생 바뀌었을텐데 하고 생각하는 쪼다가 되는 것
  • 딱히 따끔한 실패하지 않아도 (경험 비슷한 것만 시도했다가 만족 비슷한 것을 얻는 경우를 말함) 문제가 심각한 건 여전함. 즉 유사 경험에 만족하고 자신은 얻어야 할 모든 승리, 모든 의미, 모든 지혜 얻은 듯 만족하고 산다. 그렇게 평생 산다
  • 그러니 중요한 건 힘을 써볼 기회를 가지고 그 기회를 실현시켜서 대패한 뒤에 충격 속에 피어나는 호기심, 그리고 다시 구성하는 자아감각
  • 즉 자신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동시에 세상도 자기를 전부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 자기에게는 자기만의 역량, 관심사, 속도,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되. 그리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와 미래를 모양 짓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맞딱뜨리는 경험을 가지고 과거를 다시 재조립하게 되지. 즉 자신과 세계를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일 가능해져
  • 그러면서 자신이 세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타인을 지배할 수 없지만 타인과 관계하는 행동인 돌봄이 가능해져
  • 그러나 서로를 돌보는 성인들의 따스한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것 아니야. 그런 전망 전혀 없어: "내가 상상하는 성인 사회의 유대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돌봄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특정한 개인적 유대가 발달하는 정도만큼만 존재할 것이다. 인간애에 대한 기대나 사회 전체를 위해 만들어진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애정의 공동체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유대는 특정한 개인 사이의 마주침으로 파편화되고 제한될 것이다. 이런 불안정하고 변화하는 공동체는 스스로를 제한하고 [자신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느끼며 어떤 원대한 전망을 위해 자신의 작은 존재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인간들, 즉 스스로 전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 인간들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공동체는 많은 불안과 훨씬 더 많은 고독을 수반하는 사회일 테지만, 사람들이 고통 없는 조화라는 신화를 만들지 않고도 정직하게 살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 것이다.


6장/ 도시의 활용

  • 사람이 청소년기를 넘어 성숙하려면 우선 사람들이 서로를 피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생존을 위해 서로 대면하고 대결과 갈등은 반드시 있는 것임을 알게 해주어야 해 > 그러려면 도시의 관료적 권력, 관료제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조립해 내야 해. 공공권력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 
  • 경찰서나 소방서는 중앙 조직으로 운영하는 게 여전히 더 나아. 단 중앙 조직으로 존재하되 제한된 일만 하는 거지 
  • 미리 구획지어 놓는 사전계획 없애고, 예정된 조화 질서 없애고, 통일감 명료성 추구 말고. 그래서 개인들이 다른 개인들을 직접 상대할 수 있게: "이제 더는 중앙이 통제하지 않는, 지구를 설정하지 않은 도시 공간을 장려하면 도시에서 시가적, 기능적인 무질서를 조장할 수 있다. 나는 효과적으로 사회적 탐구를 제한한, 사전에 정해진 활기 없는 계획보다 이런 무질서가 더 낫다고 믿는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계획의 기능적 설계를 '실행'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역사적인 변화의 주인공이 되는 게 더 낫다." > 도시의 무질서를 통하여 적과도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됨
  • 의문: 이렇게 하면 폭력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 답변: "이런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는 사실이야말로 현대 도시 생활이 얼마나 끔찍하게 단순한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런 믿음이 그토록 널리 퍼진 이유는 아마 이 믿음이 우리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따라서 감정으로부터 숨도록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 "도시 관료제의 힘을 재구조화해서 적대 집단들 스스로 혼란을 막기 위해 일정한 휴전을 맺을 필요성을 느끼게 내버려두면, 적대가 좀 더 공개적이로 비폭력적인 형태를 띨 수 있다." 
  • 안전을 계속 누릴 수 있는 고통 없는 질서는 가능하지 않고 실제로는 노예상태를 의미해
  • 가능한 것은 대결과 갈등을 통해 좌절하고 현실과 대화하고 휴전할 줄 알게 된 성인들의 돌봄이야
  • 도시는 이런 인간들 및 그 공동체를 길러내는 데 적합해. 왜냐? 1) 그런 장은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고 2) 다양한 접촉점이 주어져야 하거든
  • 이런 도시화 사회는 그동안 열심히 연구되어 온 대중-문화 사회와 다름
  • 액션플랜: 그럼 어떤 도시를 만들잔 말인가? 자연스럽고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도시? 아니다, "나는 다양한 공동체는 자생적으로 생겨나거나 자생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오히려 창조하고 생겨나게끔 자극해야 한다고 믿는다." 구체 제안들은 생략함
  • 그래서 나타날 결과는? 1) 관료제는 축소된 범위에서 작동하며 절대 그것의 가장 좋은 상태를 사회의 가장 좋은 상태와 혼돈하지 않는다, 그럼 인간은 기계가 되는 것 2) 도시계획가 다수 증가 (전문가의 경계선 무너지고 도시민들이 직접 나섬) 3) 선출직 관료의 다양화, 실질화--인구를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일이 줄어들고 없어짐 4) 가족간 유대 약화 5) 중추 관료제는 작게 유지되며 다른 분야는 탈집중화됨 >> 이게 이 사람이 말하는 아나키로 예전의 아나키즘과는 다름 


7장/ 아나키 체제로서의 도시

  • 19세기 아나키즘의 한계: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 즉 통제 없는 사회 주창한 것은 그 통제가 부패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 즉 아나키즘은 사회 비판이론이야, 사회 재건 이론 아니라. 실제 아나키스트들이 선호했던 것은 작고 친밀한 공동체, 오늘날 파농이 꿈꾸는 것도 이것. 결국 천년왕국의 꿈이지--실현 불가능한 
  • 20세기 막시즘의 한계: 사회 건설이론으로 자신을 정립하였지만, 그리하여 파괴 이후의 세상에 대해 고민 거듭하였지만, 그가 바란 자연스러운 해방은 결코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았고, 인간의 성숙에 대해서도 고민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어. "혁명 이전이든 혁명 이후든 간에 풍요로운 세계에서 진짜 문제는 사람들에게 틀에 박힌 삶의 편안한 노예 상태를 향한 마음속 깊은 자연스러운 욕망을 버리도록 장려하는 것"임
  • 오늘은 기술적인 풍요의 시대. 이 때 갈등은 결핍 사회, 빈곤선 이하의 사회에서 보다 오히려 더 확대될 수 있어. 경제적 지지대가 있으므로 갈등이 확대되어도 그것이 상대방 제거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 있어, 갈등을 조정하는 유연성도 함께 커진다면. 즉 결핍경제에서와는 다른 식의 사회적 생존 개념이 가능해졌어! 이제 사회적 생존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지로 표현되고 결정됨. 갈등은 사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
  •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이해도 조정되어야 해. 인간의 공격성이 그토록 깊이 각인되어 있다면 그것의 분출을 장애물로 간주하고 억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대면하지 않는 것야. 요즘은 나 대신 경찰이 대신 공격해 줘, 그러면서 나의 공격충동은 차곡차곡 쌓여가. 그 공격성은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고 끓어올라 언젠가 터져나오지. 적당하게 도발 당했을 때, 아니면 심지어 도발 없이도 터져나와 
  • 이 책이 주장하는 무질서하고 조밀한 도시에서는 직접 공격 가능하고 또 해야 해
  • 마지막 문제: 사람들은 애써 구축한 편안한 고립상태를 깨고 이리 불편하고 위험한 새로운 도시에서 살기를 원해야 할까?
  • 답: 이해시키고 설득을 해야겠지. 알면 다시 선택을 할 거야. 기독교 공동체 식의 정해진 조화, 일체감, 이런 건 다 환상이야.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원래 선하며 다시 선해질 거라고 되뇌이는 것도 환상이고. 이 책이 주장하는 새로운 도시는 사람이 선량하다거나 선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 이 도시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돌보는 거야.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선의 문제는 무의미할 것이다." 이런 돌봄은 종교적 개심에서 행해진 선행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진심일 거야
  • 문제: 그럼 어떻게 사람들을 이런 도시의 건설로 향하게 할 수 있나?
  • 답: "내가 보기에 사람들을 이런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힘은 현대 사회의 특징인 지루함이다."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하면 지루함은 당연히 찾아옴
  • 결핍시대 아이들과 풍요시대 아이들은 달라. 결핍시대에는 틀이 박힌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위엄 있고 책임 있는 행동이었지만, 풍요시대 아이들에게 틀에 박힌 삶은 불필요한 강제로 보여. 결핍시대에는 안락과 안전이 가장 인간다운 목표로 보이게 되. 그러나 풍요시대엔 달라. 그리고 결핍시대와는 달리 공격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더라도 그것이 파괴로 이어지지는 않는 풍요라는 지지대가 있잖아. 현재의 풍요를 인간을 위해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라면, 이 풍요는 그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고 말아


8장/ 무질서 속의 평범한 생활

  • 이런 새로운 아나키 도시가 평범한 일상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 한 소녀의 예를 들어 설명함. 이 소녀의 이야기는 새 도시에서는 여성에 대한 억압 역시 상당히 경감될 것이라 예상함
  • 구획 설정이 바뀌고 그간의 구분선을 가로질러 힘을 공유할 필요성이 생겨나면,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침투하게 되고 다름을 덜 불편하게 느끼게 되며, 법질서에 호소하는 일도 줄어듬. 법 뿐만 아니라 군대에 대한 의존도 줄어들고. 군대로 갈 돈 도시로 돌리면 실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음. 공공 생활에서의 민감성은 비할 수 없이 높아질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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