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중국을 공부하는가 - 중국 전문가 김만기 박사의 가슴 뛰는 중국 이야기
김만기 지음 / 다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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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자란 아내는 TV에서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종종 노후에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자는 말을 한다. 너무도 쉽게 말하는 아내가 놀랍기도 하고, 나중에 진짜 가자고 할까 겁이 나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28)

그런데 영국은 달랐다. 한국보다 많이 앞서 있는 영국이지만 중국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2000년 대만 총통 선거가 있던 다음 날이었다. 어느 날처럼 학교에 갔는데 `당선자 천수이벤... 집권과 중국`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선거의 결과를 발 빠르게 분석하고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연 교수님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영국은 중국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79)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원만함과 겸손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변함없다. 굴지의 회사를 운영하는 회장이나 수천억 원대의 자산가도 겉으로는 별로 티를 내지 않는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도 아주 유연하다. 중국인들은 어느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길이 수도 없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토록 여유 있고, 날을 세우지 않는 듯하다. (91)

중국 기업의 사장들은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 1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국 기업을 방문했을 때, 말단 직원에게 아침 일찍 공항에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좀 쉬라며 조수석에 앉히고 직접 운전하며 공장을 안내하는 회사 대표도 보았다. 한국인이라면 사장 체면에는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인이 중시하는 체면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은 평등하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어야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조원 매출을 올리는 중국 회사 회장이 한국에 출장을 왔을 때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함께 출장 온 부하직원들을 위해 스스로 사진사가 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어주기도 했다. 중국인들이 식사할 때 거의 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누가 사장이고 누가 말단 직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자기보다 직위가 낮다고 사람까지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공 개념이 강한 사람들이 바로 중국인들이다. (96)

최근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학력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중국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 주석, 그리고 2인자인 국무원 총리 리커창...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들의 박사논문은 현재 정책에 반영될 정도로 실용적이다. 시진핑은 `중국 농촌의 시장화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중국 호구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재 국가의 주요 정책 중 하나로 실현되고 있다. 리커창은 `중국경제의 3원 구조에 대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의 상호협력과 발전할 수 있는 도시화 모델을 강조했는데, 이는 리커창이 제창한 신형도시화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 더욱 놀라운 것은 시진핑과 리커창은 오늘날 1인자, 2인자가 되기 전부터 중앙정치국위원 및 상무위원 자격으로 최소 10년 이상 집체학습에 참여해왔다는 것이다. (133)

중국인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들의 행동만 보고 느리고 게으르다고 생각하지만 큰 착각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느긋한 것이 만만디가 아니다. 겉으로는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체크할 것 다 체크하면서 자기에게 상황이 유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진짜 만만디다.
웬만한 내공이 없으면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진득하게 참기가 어렵다. 중국인들은 이미 그 어려운 인내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탄탄하게 쌓인 사람들이다. 그런 중국인들을 상대로 유리한 상황을 끌어내려면 우리 또한 만만디가 되어야 한다. (163)

무엇보다 깊은 꽌시를 만들려면 친구가 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중국에는 `일이 없으면 밥을 먹고, 일이 있으면 일을 처리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은 부탁할 일이 있으면 식사를 청하지만, 중국인은 평소에 식사를 하고 일이 생기면 부탁을 한다는 뜻이다. (210)

믿었던 꽌시가 떠나도 타격을 받지 않으려면 그물망 꽌시를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의 꽌시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직 차원에서 최고 책임자는 최고 책임자끼리, 팀장급은 팀장급끼리, 대리급은 대리급끼리 직급별로 그물망처럼 촘촘한 꽌시를 만들어두면 한명의 꽌시가 떠나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설령 최고 책임자가 떠나도 그 밑에 함께 일을 진행했던 다른 꽌시들이 후임자가 왔을 때 원활하게 일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216)

총장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사고가 유연하다. 한 중국 언론사 특파원이었던 지인은 왜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을 강하게 비판만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분인데도 그렇게 말했다. 잘못한 게 있지만 분명 잘한 것도 있을 텐데 잘한 것은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며 덩샤오핑 이야기를 꺼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은 중국을 몇십 년 후퇴시키는 잘못된 정책을 폈고, 덩샤오핑은 마오쩌동으로부터 주자파...로 불리며 갖은 박해를 당했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았을 때 마오쩌둥을 비판할 구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공칠과삼`, 즉 공이 7할이고 잘못한 것이 3할이라고 평가했다며 한국 정치권의 유연하지 못한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230)

중국이 도광양회에서 주동작위까지 외교 기조를 단계적으로 바꾸는 과정을 보면 마치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책을 진행한 것처럼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중국이 더 무섭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 정책은 흔들림이 없다. 중국이 수십년에 걸쳐 차근차근 힘을 키우고 스스로 리더가 되어 국제사회의 새판을 짤 수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중국인 교수와 기업 대표 등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중국 지인들은 세계무대에서 하나씩 힘을 발휘하는 중국을 이야기하며 중국은 판을 짤 줄 아는 나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에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데, 한국에는 누가 그런 그림을 그리느냐고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259)

하지만 초기에는 중국 유학생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정부의 의도대로 공부하고 돌아와 중국을 위해 기술과 지식을 전수한 유학생은 고작 30%에 불과했다. ... 덩샤오핑의 대답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래? 그러면 더 많이 유학을 보내라. 다 안 돌아와도 된다. 더 많이 보내면 돌아오는 사람도 더 많아지지 않겠는가."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통 큰 대답이었다. (299)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 동포도 훌륭한 자산이다. 베이징 대 재학 당시 주중일본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친구를 알게 되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일하면서 어학연수를 하던 친구였는데 "한국은 중국에 조선족 동포가 많으니 얼마나 좋냐"며 부러워했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진출 초기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고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10년쯤 지나 다시 만났을 때는 "한국인들은 조선족 동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조선족 동포라는 큰 자원을 왜 잘 활용하지 못하느냐"며 아쉬워했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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