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런 까닭에 프로스페로는 "여러분의 주문으로" 자신의 마법의 성에 갇힐 위험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관객이 그때까지 즐긴 환상을 놓아버리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지요. 그럴 것이 아니라 관객은, 프로스페로가 관객들의 상상의 픽션에 꼭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듯이, 손으로 박수를 쳐서 그를 풀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관객은 그것이 한 편의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연극이 실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으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수를 치고 극장을 나와서 실제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연극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밝혀주었든 그것을 이용할 수 없겠지요. 마법이 작용하려면, 주문이 깨져야 합니다. (24)

제인 오스틴의 관점도 그렇지 않았겠지요. 신고전주의 작가들에게 전반적으로 그렇듯이, 제인 오스틴에게도 진정한 감정이란 공적으로 표현되는 적합한 양식이 있었고, 그 양식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습니다. "관습(convention)"은 문자 그대로 "함께 모이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내 감정은 ... 내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공동의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감정적 행위를 배웁니다. 시리아인과 스코틀랜드인은 애도하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관습과 예법은 인간의 삶에 대단히 깊이 파고듭니다. (74)

이것은 극심한 말의 과잉입니다.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샤를의 모자를 눈앞에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세부 묘사를 합쳐서 전체를 그려보려고 애써봐야 상상력을 좌절시키지요. 이 모자는 문학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오로지 언어의 산물이지요. 거리에서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터무니없이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 자체를 해체합니다. 작가는 자세히 말할수록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많은 정보를 제공할수록, 독자에게서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명함이나 명확함이 아니라 흐릿함과 모호함이지요. (112)

만일 그녀가 두 남자에게 재난을 초래하면서 주드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냉혹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회 상황에서는 사랑이 억압적 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성애는 종속과 관련됩니다. 하디가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에서 썼듯이, "남자들이 주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언어로 여자가 자기 감정을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140)

디포는 분명 사실주의 그 자체를 즐깁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스스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듯이, 디포는 식료품상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영국 소설은 일상적 존재가 무한히 매혹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발생하게 되었지요. 소설이 태어나기 이전의 비극이나 서사시, 만가, 목가, 로맨스 등의 문학 양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장르들은 신이나 고관대작, 특별한 사건을 다룹니다. 그러니 창녀나 소매치기에는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몰 플랜더스 같은 창녀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기린에게 이야기를 시키는 것처럼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189)

하지만 디포 같은 비국교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일상생활을 그 자체를 위해 음미한다는 것은, 그의 소설이 하는 일은 바로 그런 것이지만,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질세계는 정신세계를 암시한다고 여겨지지요. 물질세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 사건을 정확히 살펴보고 도덕적이거나 종교적 의미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디포는 자신이 이처럼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서 도덕적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선정적 저널리스트의 말투로 장담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스토리와 도덕이 터무니없이 어긋나니까요. (190)

말로우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고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황에 대한 궁극적인 말을 가까스로 표명한 작품은 더해야 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차차 침묵에 빠져들 뿐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제시한 진실로 인해 죽어갑니다."우리가 더듬거리면서도 물론 변함없이 말하고자 했던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소?"라고 말로우는 묻습니다. 서사가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은 그것이 순전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08)

디포의 문단이 제임스의 단락보다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현실에 더 가깝지 않습니다. 언어와 현실의 관계는 공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디포의 산문은, 가령 밀턴의 <리시다스> 못지않게, 형식에 의해 작용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형식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실주의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는 그것에 관한 중요한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떤 절대적인 방식에서 그 작품이 비사실주의적 문학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작품이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뜻이지요. (237)

언어가 실로 인간 경험의 직접성을 포착하거나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일견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려면 언어는 두터워지고 뒤죽박죽이고 더 복잡하고 암시적이 되어야 합니다. 일부 모더니즘 작품을 해독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지요. 일상적 상태의 언어는 오랫동안 찌들어 진부하고 진정성이 없습니다. 언어에 충격을 가해야만 언어는 우리의 경험을 반영할 만큼 유연해질 수 있지요. (240)

시의 언어는 그 자체가 실체이고,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경험은 시 그 자체의 경험이지요. 시와 관련된 느낌과 생각은 시어 자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형편없는 배우들은 훌륭한 시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감정을 지나치게 과시함으로써 시를 망쳐놓습니다. 감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256)

그 한 가지 이유는 의미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소유한 땅 덩어리처럼 오로지 나 혼자 소유한 의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미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 의미는 언어에 속하고, 언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를 추출합니다. 언어는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나 한 사회의 가치, 전통, 가설, 제도, 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말하듯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온갖 행위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언어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적어도 행위의 일부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270) ... 의미는 시립 카크 공원처럼 객관적 실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주관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문학 작품 자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물적 대상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독자 없이는 문학이 없습니다. (272)

어떤 작품은 독자를 옛 친구처럼 붙잡고 늘어지며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고, 아니면 독자에게 딱닥하고 쌀쌀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작품은 독자가 그 자체와 똑같이 문명화된 가치를 공유하는 박식하고 한가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서 독자와 무언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작품은 그것을 집어 드는 사람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려고 나서서 독자의 판단력을 공격하고 독자의 확신을 낯설게 만들거나 독자의 예절 의식을 침해합니다. 또한 독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의 사색이 어쩌다 귓결에 들리도록 마지못해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278)

우리는 실로 어디서 오는 걸까요? 우리 존재의 참된 근원은 무엇일까요? (289)
......
하지만 그 수수께끼는 단순한 개인 차원을 넘어섭니다. 인간의 문명 자체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우리의 공동의 삶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문명은 범죄와 폭력, 노동과 고통, 부정행위, 비열함과 억압에 그 시커먼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매그위치가 핍의 은인이라는 사실은 이 심오한 진실을 상징합니다. 문명 세계는 이 야비한 뿌리에서 꽃을 피웁니다. "네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나는 거칠게 살았다."고 그 범죄자는 핍에게 말합니다. 핍의 행운은 고된 노동과 위법행위에서 흘러 나온 것입니다. (291)

더욱이 소설은,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은, 자신의 힘겨운 노력으로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인물에 매료됩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리허설인 셈이지요. 사실 이런 인물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그들의 진전을 용이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방해할 과거사가 적으니까요. 그들은 뒤얽힌 친족 관계망에 엮이지 않고 자립할 수 있습니다. ... 사실주의 소설은, 이미 보았듯이, 일종의 정착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전형적인 모더니즘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회적 의무나 가정적 의무에서 벗어나 고독하게 환멸을 느끼며 떠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312)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가치를 평가하는 것보다 더 주관적입니다. 복숭아를 배보다 더 좋아하는가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존 그리셤보다 더 숙련된 소설가로 생각하는가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셤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은 타이거 우즈가 레이디 가가보다 골프를 더 잘 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픽션이나 골프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348)

여기서 중요한 점은, 파인애플보다 복숭아가 더 맛있는지를 결정하는 경우와 달리 골프나 픽션에서는 탁월함으로 간주되는 것을 결정하는 데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공적인 것이고, 개인의 우연적인 사적 선호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회적 관행에 동참함으로써 그 기준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문학의 경우에 이 사회적 관행이란 문학 비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반대와 불일치의 여지는 많이 있습니다. 기준이란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입니다. ... 그런데 규칙 그 자체는 규칙을 창조적으로 응용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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