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고, 당시 삼국의 지배층 사이에는 계급도덕과 국가도덕은 있었지만 민족도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삼국 간 항쟁의 동인은 결국 왕실과 귀족의 권력욕과 물질적 욕망이라고 보고 김춘추의 외교를 높이 평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0)
이로써 모처럼 열린 신라와 고구려의 실세들 간의 담판이 무위로 끝나버렸다. 이는 그 뒤의 역사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고구려의 명운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가 나뉜 상황에서 서로간의 항쟁은 외부 세력에 대한 대응력을 크게 약화시킴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당의 침공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평화 제의를 거부한 것은 참으로 운명적인 결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신라는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당에 더 매달리고, 그 결과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남과 북 양 방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치명적인 전략적 열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77)
이제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명확해졌다. 즉 당-신라 동맹 대 고-백-왜의 연계의 대치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왜의 조정은 이런 구도와 그것이 내포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659년 7월에도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659년 말 왜의 견당사 일행이 귀국하려 하자 당 조정은 다음 해에 있을 대백제전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막고 이들을 장안에 억류했다. 백제 또한 659년에도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는 등 국력을 낭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폭풍이 전면적으로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한다. (146)
그 주에 "신라의 춘추지는 고구려의 내신 개금에게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나라 풍속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야유하여 따를 것을 청하고, 이웃나라에 화를 끼치고 그 의도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153)
이전 7세기 전반에 신라나 백제에 왜국을 대국으로 여기는 의식이 있었다. 당시 왜국은 객관적으로 신라나 백제보다 큰 나라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 상쟁하던 상황에서 서로 왜의 지원을 받으려는, 또는 왜를 자국에 비적대적인 세력으로 묶어놓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왜를 대국으로 예우하였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왜국도 백제나 신라에 비해 자국을 대국으로 여기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형화된 의례와 의식에 따라 규정된 형태는 아니었다. 왕보다 상위의 칭호로서 천황이란 호가 사용된 것은 7세기 후반, 덴무(673-686)조 이후로 여겨진다. 왜의 대국의식은 660년 이후의 역사적 상황에서 더 강화된 것 같다. (291) ...... 한편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서, 상대를 각각 인국과 번국으로 여기는 인식은 그 뒤의 시기를 통해 양국 지배층 의식의 기저를 관류하였고, 그것은 때에 따라 표면에 부상하여 격렬한 마찰을 야기하였다. (296)
그런데 삼국통일전쟁의 결과 신라의 영역이 대동강 선 이남에 그침에 따라 유목집단들과의 연결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물론 발해가 등장하여 돌궐과 연결하는 등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게 된 신라는 중국왕조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이런 면은 그 뒤에도 한반도의 왕조들에서 이어져 작용하였다. 북방 유목민 집단 및 그를 통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는 비단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 문명 외의 다른 문명과 접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균형 잡힌 대외의식과 문명의식을 지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인의 천하관이나 대외정책은 그런 면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이 차단됨에 따라 중국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양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신라인에게는 이제 당이나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대외관계의 기본 과제가 되었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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