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아이들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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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등장인물 `아흐메드 시나이`를 보고 분개하여 몇 달 동안이나 나에게 한마디도 안 하셨다. 그러다가 결국 나를 `용서`하셨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말에 분개하여 몇 달 동안이나 아버지에게 한 마디도 안 했다. 사실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반응을 더 걱정했는데 이외로 어머니는 금방 이해해주셨다. "이건 그냥 소설이잖니. 살림은 네가 아니고, 아미나는 내가 아니고, 모두 등장인물일 뿐이지." 그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훨씬 더 현명하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12)

서양에서는 <한밤의 아이들>을 환상문학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인도 사람들은 이 책이 역사책에 가까울 만큼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1982년데 내가 인도에서 강연을 할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은 제가 쓸 수도 있었어요. 저도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15)

하럼니가 거뭣이냐라는 말을 후렴처럼 입에 달고 살게 된 까닭은 나도 모르겠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할머니는 그 말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다. 나는 그 말이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무의식적 외침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에서 우러난 진지한 질문이랄까. 아무튼 원장수녀님은 거대한 몸집과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외로이 우주를 표류하는 신세임을 우리에게 넌지시 암시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할머니는 그런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랐다. (95)

"시간을 그렇게 간단히 바꿔버릴 수 있다면 도대체 뭐가 현실이야? 어디 말해보게. 도대체 뭐가 진실이야?"
오늘은 거창한 질문이 거듭되는 날인 듯싶다. 분리주의 폭동 당시 목이 댕강 잘리는 바람에 시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S.P. 부트에게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세월을 거너뛰어 이렇게 대답하겠다: "현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진실`이란 메리 페레이라가 들려주는 온갖 이야기 속에 감춰진 무엇이었다. 나에게는 어머니 이상이기도 하고 어머니 이하이기도 했던 보모 메리, 우리 모두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던 메리. 나에게 `진실`이란 내 방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어부가 소년 롤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수평선 바로 뒤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었다. 지금 앵글포이즈 램프의 불빛 아래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러한 옛일에 비춰 진실을 가늠해본다: 메리라면 이런 식으로 말했을까? 나는 묻는다. 그 어부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175)

아니, 나는 괴물이 아니다. 속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단서를 제공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결국 메리 페레이라의 범죄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는 깨달았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아들이었고 그들은 변함없이 내 부모였다. 일종의 집단적 상상력 결핍이랄까,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고...... (257)

그리고 이제 자신의 집에서 딸의 자리를 되찾은 아미나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에 담긴 감정들이 차츰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접시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성격이 듬뿍 들었기 때문인데 원장수녀님은 비타협적 태도가 담긴 카레와 미트볼 등을 나눠주었다. 아미나는 고집스러움이 깃든 생선 살란도 먹고 의지력이 깃든 비리아니도 먹었다. (300)

아미나는 온 세상의 짐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자진해서 죄를 뒤집어쓴 사람 특유의 흡인력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은밀한 죄를 고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그녀의 마력에 굴복하면 어머니는 상냥하고 슬프고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놓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마다 죄의식의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340)

내가 인도의 나랏일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하찮은 이유 때문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 짐스러웠기 때문에 우리의 작은 언덕을 벗어난 외부세계로부터 가벼운 위안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371) ...... 낭비하고 잃어버린 세월을 오늘 되새겨보니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과대망상증은 자기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된 반응이었음을 알겠다. 내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사람들을 내가 다스릴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여든 수많은 자아들이 나의 자아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테니까......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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