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 -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와 앙코르 유적의 역사 활극 메콩 시리즈 1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임경택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새롭게 창설된 극동학원은 아시아의 식민지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조사에 참가한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동양학 교육이나 고고학 교육 중 그 어느 것도 받은 적이 없는, 학문적으로는 아마추어였다. 그들은 식민지에 파견되어 현장 밑바닥에서부터 경력을 쌓아갔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서는 동양학을 공부한 엘리트 연구자가 있었고, 식민지로부터 이송되어온 고고사료나 고미술품을 이용해 현지를 방문하지 않고 현지조사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고고학적 연구를 전개해갔다. ... 양자 간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고, 그것이 앙코르 유적 고고학의 역사를 보다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프랑스 내부의 연구조직의 차이가 현지 유적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게 된다. (22)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의 거대한 유물을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유럽 열강들은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외국의 고고학적 유물을 대량으로 자국에 가져갔고, 그것들이 현재의 미술관 소장품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 행위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시대에도 계속 이루어졌고, 1920년대까지 구미 열강들은 경쟁하듯이 이집트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에서 대규모로 유물을 이동시켰다.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들라포르트의 대담하고 겁 없는 행위도 이러한 서구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는 그 행위가 아시아의 문화유산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죄의식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수많은 장해에 직면하면서도 유물을 이송시킨 자신의 고생을 영웅의 모험담처럼 당당하게 선전해 보인다. 사람들의 눈도 개의치 않고 회자되는 문화재유출의 영웅담으로부터 19세기 후반기 고고학의 현실의 일단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0)

"어떤 건축물을 복원한다는 것은, 유지하는 것도 아니요, 수리하는 것도 아니며, 개조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완벽함을 갖춘 상태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85)
......
앙코르를 답사하고 현지에서의 유적보존작업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도 그 자신이 행하는 활동을 보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복원도를 만드는 것, 현지가 아닌 파리에 미술관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미술관에 스스로 만든 복제품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현지에서 항구적인 학술적 활동을 계속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보다도 파리의 일반 대중들에게 복원도나 복제품을 `보여주는(제시하는)` 것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 세계 각지의 문물을 `보여주는` 기회로 만국박람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대이고, 일반 대중의 눈에 호소하는 스펙터클의 연출이 그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04)

이 1900년의 피노 발언에 있는 "극동은 하나"라는 말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오카쿠라 가쿠조의 "아시아는 하나"라는 <동양의 이상>(1903)의 모두어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흥미롭지 않은가? 오카쿠라가 (문화적 및 학술적으로) 대결하고자 구상한 근대 아시아의 통일적인 역사적 틀을, 거의 같은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구미 열강의 대표격인 극동학원의 원장이 인도차이나를 축으로 하여 완성시켜가던 것이다. (158) ...... "오리엔트는 자신을 표상할 수 없고, 타자의 손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159)

... 각국의 역사 편찬작업은 종합적으로 하나로 정리되는 것은 없었다. 식민지 분할의 판도를 충실히 따르듯이,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북부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영국은 인도를 독점적 조사연구영역으로 삼았고, 그 당의 미술사 편찬에 종사했다. 극동학원이 일본의 고고학 조사에 참가하는 일은 없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오늘날 일본의 고고학자나 미술사가들은 메이지에서 쇼와 전기에 걸쳐 구축되어온 자국의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의 학사적 문제점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일본의 외부,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외부에서의 역사 편찬작업에 대해서는 오로지 일본인 연구자의 관심의 내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식민주의시대의 재검토 작업의 관례로서, 비록 포스트콜로니얼을 표방하더라도 그 검토 범위는 과거의 식민지를 벗어나는 것이 거의 없다. 학계에서는 식민주의시대의 정치 판도를 반복하는 상호 불간섭의 식민지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는 식민지시대에 구조화된 학문영역을 탈식민지화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162)

20세기의 식민주의시대를 살아간 프랑스인 동양학자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의 얼굴이 있었다. 본국용의 얼굴과 식민지용의 얼굴 두 가지를 가진 쌍두의 야누스이다. 본국으로 향한 얼굴은 아카데미 입성이라는 야망을 지닌 엘리트 연구자의 얼굴이고, 식민지용의 얼굴은 가혹한 현지조사를 수행하는 탐험가 혹은 실무노동자로서의 얼굴이다.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활동하던 그들은 본국과 식민지라는, 역사도 환경도 크게 다른 두 가지 장소를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169)

그러한 자각적 오리엔탈리스트의 행상이나 사적에 대해 현재의 우리들이, 예를 들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방패 삼아, 학문의 이름을 빌린 정치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면 쳇바퀴 같은 동어반복으로서 의미가 없다. ... 나는 사이드의 분석의 골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사이드에 의거하여, 오리엔탈리즘을 단락적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정치적 악이라고 비난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담론이 횡행하게 된 현상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원래 사이드의 이 책이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의 우리들이 오리엔탈리즘(동양학)이란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푸세가 이 책을 읽었다면 무언가 당연한 것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동양학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던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전제이다. (191)

이 책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나스틸로시스의 시비가 아니라, 1930년이라는 시기에 현지의 조사원이 이 공법에 의한 수복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반테아이 스레이를 수복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말로 사건에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고, 잘라낸 부분만을 원래로 돌리고, 현상유지한 채 유적을 정비하는 선택지도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전면적 수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당시에도, 현상유지의 보강에 멈추는 방법도 주요한 선택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원들은 아나스틸로시스를 실험적으로 실행했고, 잇달아 다른 유적에도 이 공법을 전개시켜갔다. 그들은 왜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 `보여주는(전시하는)` 고고학의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네스코에 의한 세계문화유산과 얽혀, 오늘날 새롭게 한층 더 발전해가고 있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간 100만 명을 넘는 관광객을 맞이하게 된 오늘날의 앙코르 유적에는 그 역사의 폐해가 일찍이도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317)

아시아인들이 주체적으로 서구화한 미술작품은 (단순한 모방이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고, 아시아인들이 (서양인의 지도를 통해) 수동적으로 전통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인정하는 것은 불공평한 견해인데, 이것이 당시의 표준적인 서구인의 미적 가치판단이었다. 전통적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서구화한) `일본화`는 높게 평가되고, `양화`는 서양미술의 아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1922년의 일본미술특별전에서도, 후지타 등 파리의 일본인 화가에 의해 기획 발안되었으면서도, 서양인의 눈에 맞게 출품작읜 태반은 일본화가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349)

타국의 미술품이든 자국의 미술품이든, 미술품을 사유물화하는 자는 맘대로의 법령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 왜 그들은 문제가 있는 행위를 굳이 했던 것일까, 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는 고미술품 판매의 부당성을 규탄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383)
......
이미 메트로폴과 현지의 이중 삼중의 연구체제가 지닌 문제의 역사를 추적해온 우리는, 본국 엘리트가 표명한 보편적 미술사의 성공을 고고학 미술사의 발전이라는 사실 확인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연출(과장, 나아가서는 날조)하려고 하는 연극과 같은 몸짓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메트로폴의 활동은 학문적 성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현지의 고고학이 일으킨 일탈적 행위를 훌륭히 `은폐`해버린다. (390)
......
파리에 솟은 앙코르와트의 장대하고 꿈과 같은 이미지는, 식민지의 궁핍상, 그리고 식민지정책의 실패를 은폐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 환상이었다. (392)

라프라드는 식민지궁을 장식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고유하는 예술가를 소집했다. 즉, 고전과 근대와의 조화를 모색하고, 당시의 식민지 미술에도 정통한 보수적인 모더니스트들을 모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와 같은 예술가는 매우 많았다. ... 전위예술을 축으로 조합된 290세기의 모던 아트의 역사에서 그들은 완전히 망각된 존재이다. 하지만 당시의 기념비적인 공공미술을 담당한 것은 그들이었고, 그들 중도파의 예술가들이야말로 세계대전 사이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436)

인도차이나에서 1910-1930년대에 미술공예품이 왕성하게 제작되었던 것은, 앞 장에서 분석했듯이 입식한 프랑스인이 전통부흥정책을 시행한 결과였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공예제작을 지도하는 프랑스인(그롤리에)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원주민이 자발적으로 공예품을 제작하여 서구에 수출하고 이쓴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픽션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468)

1942년 11월 연합군의 반격에 의해 유럽에서는 페탱 내각의 비시정권이 약체화되어가는데, 인도차이나에서는 여전히 폐탱을 지지하는 드쿠가 계속 실권을 쥐고 있었다. 저항하는 자유프랑스의 레지스탕스활동도 활발해지는 가운데, 두 개의 프랑스가 분단된 채 혼돈된 상황을 맞이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본은 군대뿐 아니라 정치가나 경제인 그리고 대학의 연구자, 예술가 등의 문화인을 잇달아 인도차이나로 보냈다. 그리고 단기간에 서둘러 인도차이나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사실과 현상이 일본에 소개되었고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상황은 1945년 3월의 이른바 `불인처리`에 의한 인도차이나의 무력제압을 거쳐,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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