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적 의식은 단지 역사적 정신 태도의 부활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난날에는 결여되었던 요소, 즉 과거 자체에 대한 강한 애정 및 지난날과 접촉하고자 하는 감성적인 그리움을 낳았다. 그리고 그간의 고문서에 근거한 사료 비판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새로이 획득했다. 즉 엄밀히 검증된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는 비판적 감각, 다양한 관련성을 조망할 수 있는, 지난날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넒은 관점과 판단 그리고 과거의 모습에 시적인 필치를 부여하는 표현 능력의 강화가 그것이다. (34)
나 자신은, 역사 연구가 애매하거나 파괴적으로 작용함을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다. 역사에 깊이 몰두함은 이 세상이 좋아 그 관찰에 힘을 다하는 한 가지 형태로 여겨진다. 역사는 자연과학 못지않게 자기 중심적 처지에서 그리고 그를 둘러싼 상황의 의미나 효력의 지나친 평가로부터 우리를 치유한다. 우리 자신의 한정된 사람됨을 시공을 넓혀 지난날과 앞날에 결부시켜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 바람직한 것은 없다.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하며, 영원히 노력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능력은 한정된 것이며, 천재와 영웅 또한 보다 강력한 힘에 의존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일까. (91)
마지막으로 이 도식에 대립하는 가장 중요한 이의에 관해 언급하자. 모든 역사는 교훈적이며 교훈적이기를 원하고 또 교훈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는 큰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 지금도 가끔 이런 답이 나온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해서라고. 극히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를 알고 또 배우고자 한다고 여긴다. 나 자신은 그렇게 폭넓게 생각한 적이 전혀없다. 나는 역사가 과거 자체를 관찰하고자 노력한다고 확신한다. ... 역사 연구의 목적은 언제나 `이해`에 있다. 그러면 이 이해의 대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혼란한 현재의 특수한 가능성이나 상황이 아니다. ... 아니 과거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두운 현대의 질풍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삶 자체의 영원한 의미, 영원한 충동, 영원한 평온이 관심사다. ... "원래 개인의 삶에서처럼 지난날 고뇌와 기쁨이었던 것이 이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사는 스승`이라는 명제 또한 보다 고도의 그리고 신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언젠가` 현명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혜로워지고자 원한다." (95)
역사란 언제나 과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언제나 과거 속에서 찾는 의미를 파악하고 밝히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지라도 이미 의미를 전달하고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의 절반은 미적인 분야에 속한다. (111)
지난날 역사의 과실을 맺은 나무들도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상상력의 결여라기보다 역사적 사건 자체의 성격이 변한 데서, 혈색을 잃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본능은 날로 역사의 신 클리오의 영역의 주변부로, 분명히 역사적 성격이면서도 역사 자체는 아닌 학문의 영역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고학, 민족학, 종교학, 예술사, 문예 및 그 밖의 많은 분야가 거기에 속합니다. 이미 세기의 중엽에 다가오고 기술적 과학적인 수확 외에 본질적인 것은 거의 이룩하지 못한 이 20세기에 미래 인류는 역사적인 형태를 다시 발견할까요?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135)
나는 질 미슐레가 이야기한 로베스피에르의 일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혁명 몇 년 뒤, 어느 젊은이가 메를랭드 티옹빌에게 왜 로베스피에르를 유죄로 몰았는지 물었습니다. 노인은 침묵하며 할 말을 찾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일어서서 몹시 거친 몸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라고? 로베스피에르...... 만약 너도 로베스피에르의 녹색 눈을 보았다며녀 틀림없이 그 사나이를 유죄로 몰았을 것이다." ...... 이 작은 에피소드는 인간 본성의 기묘한 변덕이 어떤 경우에는 결정적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해줍니다. (155)
부르크하르트의 지혜와 깊이, 대규모의 종합 능력, 사료의 수집과 철저한 탐구라는 학자로서의 참을성 있는 열정, 이 모든 결합은 사학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심성은 그에 더해 귀족적이고 절제를 갖추어 시대가 바란다 하여 시류에 따르는 일이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진부한 진보 이념에 결코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체를 미슐레보다 더욱더 깊고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르네상스를 계몽주의나 진보로부터 떼어놓은 그리고 르네상스를 더 이상 훗날의 우월성에 이르는 서곡이나 고지(告知)가 아닌 바로 `독특한`(sui generis) 문화 이상으로서 관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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