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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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인은 가련한 그레트헨이 아닙니다. 인생 경험이나 교육, 지성에서 결코 나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입니다. (28)

한스 후버 박사가 마리아를 강제로 킬히베르크에 입원시킬 때, 헤세가 암묵적으로 동조했을까? 후버 박사가 건강한 사람들에게 병가 진단서를 발급해주고 그가 운영하는 요양소에 입원시킨다는 사실을 과연 헤세는 몰랐을까? 후버 박사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란는 걸 헤세는 전혀 알지 못했을까? 주 경찰이 다다이즘을 표방하는 이주 예술가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할 때 후버 박사가 취리히에서 그들에게 진단서를 발급해주고 은닉해주었다는 사실은 오포 플라케와 한스 리히터가 쓴 편지로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 심지어 후버 박사에게 마약을 공급받기도 했다. 9월에 마리아의 병이 재발했을 때 투치아가 그녀를 돌보겠다고 했다. 그랬다면 마리아가 좀 더 빨리 건강을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정신병원`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224)

헤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은 항상 존재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유혹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없다. 그리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그의 사랑이 분출되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사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육체적인 사랑도, 정신적인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여주는 사랑의 표식은 애칭을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나를 `점박이`, `푸른 별`, `아기 노루`라고 불렀다. (248)

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아가서 무척 화를 내고 있겠지요. 그리고 내가 당신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겠지요. ... 나는 한때 나를 사랑했던 당신의 감정을 되살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나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여자들을 만난다 해도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는 못할 겁니다. (250)

얼마 전부터 나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편지들을 매일 저녁 정리하고 있단다. 헤르만이 보내온 편지들도 다 읽어보았지. 그의 편지들을 읽다 보니 예전에 분명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이해가 되는 거 있지. 즐겁기도 힘들기도 했던 지난날들을 이젠 편안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단다. 헤르만이 어떤 사람인지 예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된 거 같아. 그에 대한 연대감과 존중하는 마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단다. 헤세라는 사람은 이제 시인으로서만 나에게 존재하는 거지. (291)

몇 주 전에 헤세는 큰아들 브루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결혼은 예술가나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줄 뿐이란다. 기껏해야 큰 기대 없이 체념하고 사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 커다란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영혼과 생명력이 서서히 죽어가는 거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거지." (395)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의 서평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금, 헤세는 후고가 그리워졌다. 후고는 무욕의 고행자, 정신적인 동반자였다. 그에게 속세의 재물은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었다. 헤세는 이미 1928년에 <디 노이에 룬트샤우>에서 "후고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는 존겨오가 경탄에서 시작해 내면적인 우정으로 승화된 사랑"이라고 회상했다.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 헤세는 그를 "엄격한 수도사" 내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양심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나르치스는 "모든 비판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정신세계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후고가 걸어간 길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 질환을 치유하는 데는 중세의 악마론과 구마술이 프로이트를 포함한 오늘날의 치료 기법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404)

니논은 부모 집에서 보고 들은 대로 행동헸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동부 유럽과 스위스의 풍속이나 예절이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과거 러시아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엄격한 상하관계였다. 니논은 하인들이 그녀의 명령을 마지못해 따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반면 하인들은 헤세를 무척 좋아했다. 헤세는 베른의 독일어나 테신의 이탈리아어 사투리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탈리나와 늙은 정원사 로렌초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416)

틸리와 막스 바스머, 헤세와 니논, 넬리는 함께 마조레 호수로 놀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저택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욕실에 들어갔던 니논이 갑작스레 겁을 내며 뛰쳐나왔다. 그리고 히틀러 사진을 보았다고 헤세에게 속삭였다. 헤세는 틸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녀는 "난 히틀러를 누구보다 존경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헤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이마에는 핏대가 솟아올랐다.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막스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뒤로 헤세는 브렘가르텐의 여주인 틸리와 관계를 끊었다. (449)

1962년에는 페터 바이스가 다시 한 번 헤세를 방문했다. 헤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바이스는 "존경해마지 않는 명인" 헤세를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헤세와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식사하는 동안 니논 부인은 문제가 될 만한 건 모두 차단했다. 특히 늙은 헤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 나는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다." 로가노로 돌아온 바이스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수많은 방문객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503)

다음은 헤세의 고백이다. "나는 평생 나에게 걸맞은 종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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