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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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은 그렇네. 성경은 오래된 책이지.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성경 안에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거야, 진실한 이야기들도 아주 많이 들어 있고 말야.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난 꼭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 (37)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하나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79)

이 작은 세계는 그의 것이었고, 그가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속속들이 알고 사랑했던 세계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관목과 모든 정원이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녔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으며, 내리는 빗줄기와 눈송이도 그에게 말을 걸었었다. 이 세계에서는 공기와 대지가 그의 꿈과 희망 속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응답하고 그 삶을 함께 호흡했었다. 크눌프는 생각했다. 아마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 근방에서는 자신보다 이 모든 것들을 더 깊이 소유해 본 집 주인이나 정원 주인이 없을 것이라고. (119)

크눌프가 연신 고집을 부렸다.
"제가 열네 살이고 프란치스카가 절 버리고 떠나버렸던 그때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전 여전히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제 안의 무엇인가가 고장났던가 망가져버렸던 거죠. 그때부터 전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아뇨, 잘못은 단지 당신께서 제가 열네 살일 때 죽게 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어요! 그랬더라면 나의 삶은 잘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한 것이 되었을 겁니다." (13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그래요"
크눌프가 말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사실은 저도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34)

나는 전지전능한 자세로 삶과 인간성에 대한 규범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를 사로잡는 것을 묘사할 따름입니다.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헤쎄가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중,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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