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이란 결국 작가의 삶이 독자적이어야 가능함을 깨달았다. 좋은 작품에는 모두 고유명사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움푹 파인 그 이름들을 본다. (5)
이처럼 황창배의 회화에는 모든 것이 융합되어 있다. 고전의 차용과 그것의 현대적 해석이 있고, 수묵이 있는가 하면 채색이 있고, 형상이 있으면서 형상의 부정이 있고, 의도적인 개입과 그것을 지운 자취 또한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그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 (64)
육태진에게 미디어아트는 자신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반영하는 매개다. 영상으로 다가오는 그의 자화상은 한정된 공간 속에서 특정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 천형 같은 생의 노동과 육체의 그치지 않는 욕망을 슬프게 투영한다. 그는 영상을 통해 흡사 유영하는 영혼을 불러내듯이, 초혼 의식을 치르듯이 자신의 신체를 호명한다. 그의 영상 작업은 한결같이 자신의 몸을 매개로, 그 속에 내재된 정령을 반복해서 주술처럼 불러낸다. 병들고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그렇게 응시했던 그는 결국 마흔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79)
예술은 문화의 영역이고 가치의 세계이다. 때문에 예술에 선진, 후진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양식, 어떤 진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그림에는 우리의 분위기가, 우리의 공기가, 우리의 뼛골이 배어야 한다. 감히 나는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적인 그림을 그렸다고는 생각한다. 내가 그린 산수나 초가집들은 우리나라가 아니면 찾아볼 수가 없는 세계이다. (91)
그[김천일]가 현장으로 나가 대상 앞에서 몇 달씩 머물며 치열하게 그려낸 산은... 우선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 저 산에서 보이는 것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고 모두 그려 넣는다. 보이는 모든 것을 재현하는 철저함을 적극 신봉하고 있다. 그는 진리란 대상이 핍진하고 내재율에 맞게 묘사될 때 스스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산의 내재율과 기운을 진실하게 그리고자 한다. 아는 것, 체험한 것을 내적 공명과 함께 화면에 극진하게 옮기고자 한다. 상상을 통한 꾸밈을 피하기 위해서 직접 현장에서 그리며, 눈의 착각을 막기 위해서 망원경을 이용하기도 한다. (134)
정주영은 이른바 원본과 차용, 관념과 실재, 진경과 설경, 추상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 그림 안의 그림과 그림 밖의 그림, 그림과 그림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을 더듬고자 했으며, 이를 일러 '활경活景'이라고 명명했다. 그 단어는 지금 내가 마주한 내 앞의 바로 저 풍경이자, 옛사람들이 그 옛날에 마주한 바로 그 풍경이며, 작가 자신의 시간 속에서 마주했을 바로 그 풍경을 모두 지칭한다. (146)
빛과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하는 것이 오랜 나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어느 순간의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깔을 갖고 싶다. 이것은 '현장'으로부터 떠나 그림을 그리려는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태양 아래서의 색이 아니라 내면의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눈으로 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으르 그려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곤 한다. (155)
이처럼 이인성은 근대화 과정에 놓인 우리 농촌과 강산의 풍토를 '그림'처럼 보려고 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리가 사는 터전으로서의 농촌을 미화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박하고 한가로운 원주민처럼 묘사했다. 이 같은 시선은 사람의 삶을 삶으로 본다기보다는 그림의 소재로만 보려는 자세이다. 그럼에도 삶을 풍경으로 읽어내는 감성적 능력만은 탁월하다. (227)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연소시킨 흔적으로서 살아있는 증거로써 그날그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늘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하고, 아름답다. 나의 작업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283)
나는 내 그림이 그 어떤 사실주의자의 그림보다도 리얼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다섯 감각만으로 제한된 실상, 제한된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이 다섯 감각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감각의 더듬이를 붓 끝에 달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오감으로 모두 파악하기엔 너무도 신비하지 않은가. 나는 나의 리얼리즘을 신비한 리얼리즘, 혹은 신비하고도 과학적인 리얼리즘, 또는 감각으로는 필연코 느낄 수 없는 '리얼함'이기에 감성적 리얼리즘으로 부른다.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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