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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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김석범 등의 일방적 주장이 엄밀한 검증 없이 오랜 기간 통용돼온 데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가 작용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우리 민족이 갈라져 독립된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한 데다 냉전의 격화 속에 중국내전, 한국전쟁, 일본의 재무장과 전범 세력의 부활 등이 이어지면서 '반공'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토벌대에 속했던 사람들이 남에서는 지배 질서의 한 축을 장악했고, 항일 세력의 일부가 북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시절의 적대적 대립이 남과 북의 현실에 일정 부분 녹아들어 공론 형성을 오랜 기간 봉쇄했다. (21)

군부의 발호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폭주에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천황제 절대국가를 추구하는 통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본인은 '비국민'으로 규정돼 철저히 고립되거나 제거됐다. 그러나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엄혹한 조건 아래서 천황제와 일본 파시즘에 정면으로 저항한 일본인이 있다. 그중에는 만주에서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운 항일 무장 세력의 투쟁에 죽음으로써 연대감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다. (41)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는[반민생단 투쟁을 말함]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 이간책으로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은 일반 중국인에게 '일본 침략자의 하수인', '두 번째 일본 놈'으로 비처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일본군 통역을 하거나 일제의 위세를 빌려 활개 치는 친일파 조선인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1931년의 붉은 5월 투쟁에서 조선인이 앞장서 싸운 것이 중국인 유지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일제의 압제에 맞선 항일투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나이 든 조선인이 약탈, 방화를 하며 동3성을 탈취하려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27)

1930년대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만주의 항일투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조선인이 먼저 시작한 무장투쟁이 1930년대 전반 만주의 잡다한 세력을 결집시킨 반제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중공당 중앙이 1935년 8.1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본토의 통일전선 결성을 촉구한 것은 만주에서 실현된 통일전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만주의 선도적 투쟁이 중일전쟁 기간 중 국공합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나아가 만주와 프랑스에서 같은 해에 통일전선이 결성된 의의가 실로 크다고 평가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는 파시즘 세력의 대두에 맞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통일공동협정을 맺었고 만주 지린에서는 동북항일구국총회가 결성됐다. (186)

한국과 중국에서 간도특설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어찌 보면 비교할 건더기조차 없다. 중국에서는 ... 항일전쟁 기간 중 일제의 편이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사람들은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심판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이 항복한지 20여 년이 지난 문화대혁명기에도 간도특설대 복무자들은 거리에 끌려다니며 구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 중국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간도특설대가 역사적 청산 대상의 하나라는 공론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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