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 - 현대의학이 가로챈 행복하게 죽을 권리
브렌던 라일리 지음, 이선혜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어쩌면 여러분은 이런 내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 같은 의사는 멸종 위기에 처한 공룡과도 같다. 나는 의료 역사 속 주목할 만한 한 시기의 소멸을 목격한 사람의 눈으로 확자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8)

나는 감명을 받았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티나의 놀라운 타자 실력이 아니라 정직성이었다. 그녀는 지난 밤에 워너를 진찰했을 때 신경학적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음을 주저 없이 인정했다. 일류 대학 병원의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번처럼 쉽게 용서될 수 있는 경우라 해도 잘못을 인정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47)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재력도 갖춘, 사리를 아는 똑똑한 남자가 세계 최고의 병원 중 한 군데도 아니고 여러 군데에서 암 치료에 실패해 놓고서도 어떻게 이런 상태에 있을 수 있을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을가? ... 간 이식 같은 극단적 수술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기나긴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항상 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위해 고민하고, 그의 건강 상태와 기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그를 잘 알고 있는 단 한명의 의사를 만나지 못했을까? 미국 최고의 병원에서 어떻게 이런 소통의 결핍이 생겨나고 있을까? (69)

많은 환자가 신체화로 인해 극심한 자아애를 경험하고 심한 고통을 겪는다. 안타깝게도 신체화는 소통의 한 방법이 되었다. 의료가 대중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신체화를 통해 고통을 표현한다.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는 사람들은 의사 앞에서 두통이나 피로감 혹은 모호한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자신의 걱정과 불안을 풀어 놓는다. 그러나 많은 의사가 환자들이 호소하는 이 같은 증상이 심리적 고통의 표현임을, 진료실로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다. 의사가 이러한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환자의 ‘진짜‘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105)

뭐든지 다 시도해 주기를 바라는 환자는 어디에나 있고,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려면 귀 기울여 듣고, 환자가 어떤 사람이며 환자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뭐든지 다‘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노력에서 출발해야 한다.
슬픈 이야기는 대부분 너무 늦은 뒤에야 이 같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 생겨난다. (142)

리스트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놓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답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날 프레드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던, 내 책의 그 구절 안에. 책에는 신경성 원인과 심장 및 폐와 관련된 원인을 포함하는 실신의 다ㅣ양한 원인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별도의 표 안에 ‘심장성 실신의 드문 원인‘이 나열돼 있기까지 했다. ... 만약 책을 근거로 모든 가능성을 나열하고, 하나 속은 두서너 개만 남을 때까지 검사 결과에 따라 하나씩 지워갔다면 우리는 아마도 심방 점액종과 맞닥뜨렸을 것이다. (241)

프레드가 세상을 떠난 뒤 여러 달 동안 마사와 나는 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만, 그것도 그녀의 집이 아닌 병원 진료실에서 마주했다. ... 마사와 나는 우리가 과연 유죄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기소된 적은 없지만 공동 피고인이 되었고 암묵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녀의 딸은 어머니가 나를 무척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마사와 나는 그랬다. 우리는 여전히 자식들과 보물들 그리고 추억을 공유하는 별거 중인 부부와도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서로를 피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타까워했다. (259)

그러나 정신 상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섬망을 조기 진단하려면 환자의 평소 정신 상태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섬망 조기 진단이 어려운 이유이다. 환자들이 과거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간호사와 의사의 진료를 받는 급성 환자 치료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은 섬망의 발병을 예고하는 감정이나 태도의 변화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더 심각한 것은 고령인 입원 환자가 섬망 증세를 보일 때 의료진이 치매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결국 의료진은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정네, ... 등의 정신 작용제를 투여하게 되고, 이러한 약물은 환자의 섬망 증상을 약화시킨다. (287)

하나의 체계를 해체하는 것은 ... 원인보다는 결과를 공격하는 것이다. 결과에만 공격을 가한다면 그 어떤 변화도 이룰 수 없다. ... 체계 잡힌 정부를 혁명으로 무너뜨렸다고 해도 그 정부의 근간이 되었던 체계적인 사고 유형이 그대로 살아남았다면, 그 사고 유형은 뒤를 이어 들어서는 정부 안에서 또다시 터를 잡을 것이다. 체계에 대한 논의는 넘쳐나지만 제대로 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다. (317)

아버지는 내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 분이셨다. 아버지는 내게 친구가 되어 주셨다.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 다음으로 내가 가장 사람한 사람이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벌써 아버지가 그리웠다.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다. 마침내 끝났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떠올랐다. 잠시 뒤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490)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밤, 일은 그렇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내가 이미 내린 결정을 왜 번복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어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와 베니 굿맨 그리고 춤을 추며 지새운 밤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를 차마 같은 날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바다를 내다보던 어머니 얼굴에 어려 있던 표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바닷바람이 정말로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꺼풀을 떨면서 기쁨의 한숨을 내쉬셨다. (4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