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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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광화문의 일민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플립북: 21세기 애니메이션의 혁명>에서 안네 마그누센 감독의 첫 영화 <75개의 언어를 하는 남자>를 봤다. 독일인 자이어바인이 주인공으로, 그는 독일이 점령국들의 언어를 금지시키고 사라지게 만드는 행태를 비판했다. 그는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찾아가 자국 언어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고, 종교 활동을 하게 하도록 장려한다. 


로토스코프 방식으로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은 역동적이면서도 따뜻한 움직임으로 자이어바인의 서사를 전달했다. 

안네 마그누센의 작품은 그후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고, 그 잔상이 가시기 전에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의 『문맹』을 만났다.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난 독자라면 그 누구든 그녀의 책을 찾게 될 것 같다.


쓰는 여성이자 어머니,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스위스에 정착해야 했던 헝가리 출신의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스물한 살의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과 국경을 넘는다.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스위스에 정착하게 되지만 그녀는 하루 아침에 문맹이 된다. 더이상 자국의 언어로는 쓰는 행위를 이어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 스위스에 도착하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은 거의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97쪽)

쓰는 행위를 마치 숨쉬는 것처럼 당연한 삶의 행위로 정립한다는 건 어떤 감각일까. 그녀는 자신의 나라를 잃고 민족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써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언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나아가 희곡과 소설을 써내려갔다.

오늘날 세계화는 점점 심화되어 가고 누군가는 '국가'와 '국경'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라고 본다. 기성세대가 개인보다 집단을 더 중시했던 성향이 강했다면 요즘의 젊은 세대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외치고 '나'의 삶에 중심점을 찍는다. 어느날 대한민국이 사라진다면? 글쎄. 어떻게든 어느 땅에서든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때로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표현한 문장들에 웃곤 했다.

그러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스위스에서 새 삶을 살면서도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함께 국경을 넘었던 이들 중 일부는 형을 살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헝가리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1900년대 중반이라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어떤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2-113쪽)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오늘도 한국어를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다. 때때로 쓰는 일이 귀찮아 이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말하고 듣는 게 버거워 사람들을 피하기도 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은 그 권태를 내려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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