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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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이 책을 누군가로부터 받은 건 무려 3년 전이지만, 이제야 서가에서 꺼내 읽었다. 당시 책을 건네줬던 이는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읽고 있었는데 그 책은 훨씬 두껍고 어려워보였다. 책을 건네줬던 사람은 늘 멋지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줌파 라히리라는 저자 또한 매력적이고 지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동경이 나의 지적 허영의 근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영어권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나아가 이탈리아어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그녀의 위대한 모험담이자 그 모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책부터가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책이니까 말이다. (여기에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단편소설도 두 편 수록돼있다. 단편 「변화」와 「어스름」은 아주 짧지만 독특하고 불안한 분위기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면서, 따로 떼어 생각해서 읽기에도 매력 있는 이야기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는데,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불현듯 외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이 오랜만에 불타올랐다. 오랫동안 놓고 지냈던 일본어를 다시 열심히 공부해보고 싶었다.

특히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를 넘어 새로운 사고방식에 눈을 뜨게 된다. 

"이 생각을 글로 쓰기 얼마 전 난 로마에 사는 친구인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소유하고자 하는 나의 갈망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법과 구문이 당신을 바꾸고, 다른 논리와 감정으로 이끌어줄 겁니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128쪽


우리나라 말 중에 '한이 맺히다, 한이 서리다' 등의 표현에서 '한'이라는 개념은 영어로 바꿔 표현하면 'Han'이다. 영어권에서는 '한'의 개념을 명확히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외국어 중에도 그런 표현들이 종종 있다. 우리나라 말로 명확히 대체될 수 없는 개념들. 또는 일본어의 문법도 그렇다. 우리 말에는 없는 문법이 존재한다.
단지 새로운 말을 배우는 거지만,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의 사고방식이 녹아 있다.

그리고 줌파 라히리는 타성에 젖은 글쓰기를 반복하던 스스로에게 있어서, 낯설고 새로운 언어 이탈리아어로 글을 씀으로써 작가로서 새로운 인격을 갖출 수 있었다. 줌파 라히리에게는 새로운 글쓰기를 위한 시도이자 위대한 모험이 아니었을까?

문득 쓰기를 게을리하는 스스로에게는 '타성에 젖은 글'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에 있어서는 반성을, 외국어 공부에 있어서는 열정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에도 도전해보자.
지적 허영이면 어때... 열심히 읽고 쓸 뿐이다.


p.s
이 책을 읽다보면 문득 얼마 전 읽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이 떠오른다. 여성 작가라는 점도 같지만 그 두 작가는 각자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자국의 혼란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문맹의 입장이 되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 작가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반면 줌파 라히리는 영어권 작가이면서도 낯선 언어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갖고 싶어'한다. 거기에서 나아가 이탈리아어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줌파 라히리 역시 어린 시절 언어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가족들은 인도 벵골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살았다., 줌파 라히리는 집에 있을 때는 벵골어를 써야 했고 학교에 있을 때는 영어를 완벽히 구사해야 했다. 

"내 분열된 정체성 때문에, 아마 성격 때문에 난 불완전한, 다시 말해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적인 원인 때문일 수 있다. 동일시하는 언어가 부족한 탓이다. 미국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벵골어를 외국인 억양 없이 완벽하게 말하고자 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뭣보다 내가 완벽히 그분들의 딸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편 난 미국인으로 온전히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내가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했음에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뿌리를 박지 못하고 붕 떠 있었다. 난 두 가지 면이 있었고, 둘 다 불완전했다. 내가 느꼈던 불안, 간혹 지금도 느끼는 불안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실망스럽다는 느낌에서 온 것이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93쪽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문맹』 두 권의 책은 언어와 정체성, 언어와 삶 사이에 그어진 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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