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역사 세미나리움 총서 11
리사 자딘 지음, 이선근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설 연휴 기간 내내 책을 읽으면서 세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섬세한 필치와 통찰력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500여쪽에 이르는 책의 분량인데 방대한 분량임에도 어디 한곳 빈틈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고증이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마치 실물을 대하듯 그려져 있다.

둘째는 아름다운 예술의 시대라고 생각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면에는 부유한 사람들의 과시욕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화려함 속에 숨겨진 민중들의 모습이다. 부유한 귀족을 위하여 자신의 몇달 또는 몇년치 생활비와 맞먹는 금박의 물감을 사거나 보석의 가루를 그림에 칠하였을 수많은 화가들, 또는 턱없이 싼값을 지불하고도 자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또 무명의 화가들과 장인들의 궁핍한 생활이 떠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이든 신자유의 시대이든 물질 문명의 모습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시대의 왕관을 쓴 인물들과 상인들은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로부터 예술 작품을 얻기 위해 어떻게 경쟁하고 비단과 향료를 구하고 누가 국제 무역의 중심지를 장악할 것인지를 놓고 벌인 격렬한 상업상의 전쟁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수많은 성화와 초상화, 전쟁을 기록한 화려한 그림, 서적, 지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철저한 고증과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것들이 상품으로서 기능하였을까? 신흥 명문가들이 그 지방의 성당과 교회에 기증한 종교화들 역시 성모나 성인들 그림 주변에 그려진 장식품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아주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스러운 인물들은 당대의 물질 세계에서 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그림 속 실내 장식품 하나하나는 후원자 자신이나 그 지역 다른 상인들에게서 빌려온 물품들(보석, 촛대, 성배, 카펫, 걸개, 태피스트리, 가구, 직물, 도자기 등)과 판에 박은 듯이 일치한다. 그래서 결국 그림 속의 성모와 성인들은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한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진정한 거룩함은 우리들에게 부와 안락, 아름다운 물품을 소유하라 수 있는 특권을 가져다 준다는 의미이라는 것이다. 종교화에는 금색이나 금박 장식을 사용하였고 화려하고 값비싼 물감이 사용되었는데 그중 울트라마린 블루는 동방에서 수입한 준보석인 청금석을 간 후 그 가루를 여러번 물에 녹여서 빼낸 고급의 안료였다.

한편, 활판 인쇄가 생기기 전에는 필사본은 소중한 세공품의 일종이었다. 즉, 화가와 장인이 합작하여 부유한 수집가들의 눈을 끌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예술작품 이었던 것이다. 주교의 취임식 등 특별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사본을 주문하기도 하고, 신랑신부가 결혼할 때에는 화려하게 장식되고 제본된 종교 서적을 서로 주고 받기도 했다. 사본이든 인쇄본이든 성경과 같은 책을 구입한 뒤 많은 돈을 들여 황금 및 능라와 가죽으로 화려하게 묶었으며, 독특한 도안위에 그 책이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있도록 문장과 명문을 그려 넣게 했다.

장정은 딱딱한 나무판지를 값비싼 벨벳이나 비단, 금실로 짠 비단, 혹은 무두질한 송아지 가죽이나 양피지로 감싼 다음 화려한 문양들을 표지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나서 사용하지 않을 때 책을 걸어 놓기 위하여 정교한 금속 걸쇠나 걸개를 달았다. 심지어 인쇄업이 발달하여 더 이상 필사본이 필요 없게된 시기에도 어떤 출판물은 장마다 첫 번째 대문자를 일부러 인쇄하지 않고 공백으로 두었으며, 위아래, 좌우에 넓은 여백을 둔 뒤, 그 빠진 대문자와 자리와 여백에는 인쇄기술이 없던 시절의 필사본 수준으로 수작업으로 채색하고 금박을 입혔다. 그러다 보니 각 페이지마다 인쇄된 부분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화려한 무늬와 금박 장식이 훨씬 넓었다.

이쯤 되면 책은 단순히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호들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