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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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고로, 인간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거짓이다. 사실 인간이 진심으로 견뎌 낼 수 있는 일은 손꼽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진심으로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지닌 채 성장했다.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런 문장은 볼라뇨 말고 또 누가 쓸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좋은 문장들도 세상에 많다. 내가 볼라뇨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문장은, 볼라뇨를 읽을 때에나 만난다. 진짜… 미친 것 같음….

단편집 <전화>는 세 파트로 구성되어있다. 작가 혹은 작가의 생활, 창작 혹은 창작의 이면에 대해 다룬 이야기들이 담긴 1부, 죽음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긴 2부,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3부. 개인적으론 1부의 작품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글쓰기와 문학에 대해 갖는 감상주의적 태도를, 베테랑 의사가 예리한 매스로 종양을 제거하듯 해체하는 작품들이다.

첫 작품 ‘센시니’에선 동경하던 작가 센시니를 만난, 볼라뇨의 분신이자 젊은 작가인 아르투로 벨라노가, 글쓰기가 아닌 공모전에 대해 조언을 듣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목을 공모전 헌터라고 지어도 될 판…. ‘엔리케 마르틴’에선 시에 대한 어떤 이해하기 힘든 집념과 열정을 보이다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는 인물이 나온다. 시 같은 건, 문학 같은 건 치기어릴 때나 쓰는 것처럼 얘기하는 때 조차도, 무언인가 창작하던 인간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서스펜스와 함께 코미디를 제대로 작렬시키는 ’문학적 모험‘도 인상적이다. 사랑 이야기이지만, 역시 결코 일반적인 방식으론 다루지 않는 표제작 ’전화‘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2부와 3부도 물론 너무 좋았다. 좋은 작품들을 쓰지만 공모전에 천착하게 되는 작가와 시인이 되지 못 한 시인, 어쩌다 정의의 편에 서게 된 프랑스의 ‘삼류’작가, 형사들, 발음이 새서 ‘예술’이라고 말했던 건데 그 덕분에 살게 되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까지 되어버리는 전쟁 포로, 교육 받기를 그만두는 낙제생, 마피아와 엮인 체육 교사와 러시아 여자 육상 선수, 미국의 포르노 배우까지, ‘정착’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 삶을 사는 인물들을 이 소설집은 보여준다. 감상적인 태도 없이, 거리를 두고. 그렇지만 강렬하다. 글쓰기, 문학, 예술, 섹스, 죽음, 자살, 폭력, 포르노, 범죄, 코미디까지 어떤 소재를 다루든 예외없이 강렬하다. 그러니 기억하시길. 볼라뇨를, 로베르토 볼라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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