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요나스 메카스 지음, 금정연 옮김 / 시간의흐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후에 직장 생활이란 걸 시작한 뒤부터, 나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일이 많았다. 연락을 주고 받은 지 오래되었던 중학교 동창과 책을 매개로 친해졌고,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계시는 분과 북스타그램을 매개로, 직접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간 상태였는데도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새로 입사한 분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내게 행운이 있다면 이런 것들이겠지.

 

책의 세계가 넓고 깊은 만큼, 나의 친구들이 독서를 하는 이유들도 다양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지식과 정보, 서사들을 입력해 그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 같다. 신선한 언어, 낯선 언어, 새로운 언어로 사유의 폭을 넓히려고 하는 것도 같다. 이를 통해 자기만의 통찰과 지혜를 생성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이른바 고전을 독파하기도 하고, 현대의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교양 과학 서적 등을 읽는다. 진리를 찾고 윤리적인 고민들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시나 소설, 에세이 같은 문학을 통해 삶을 더 잘 살아내기를 원하기도 한다. 나는 나와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그들을 통해 읽기라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읽기란 건 뭐지. 책을 왜 읽지. 나는.

 

나도 나의 친구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한다.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읽으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검토한다. 때론 현대성을 탐구한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보다 잘 읽어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변화와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다. 내 정신에 불을 질러줄 예술들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글들을 읽으면서는 어마어마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활동했던 리투아니아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시인 요나스 매카스가 쓴 소설 혹은 에세이 혹은 헛소리일 뿐일지 모를 이런 글. 금정연 작가님이 번역한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요나스 매카스의 영화를 본 적은 없고, 국내에 번역된 책은 이 책을 제외하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라는 인터뷰집 뿐이다. 그래서 뭐 잘 아는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글이 너무, 좀 지나치게 좋았다. 왜일까. 구체적이어서? 메타적이어서? 사실 소재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글쓰기 그 자체라고 생각해서? 아님 그냥 웃겨서? 자기 맘대로 써놓은 글을 보고 왠지 속이 시원해서? 그래서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듯한 감각이 주어진 것 같아서? 뭐 그 모두가 아닐까.

 

글쓰기는 다른 무엇과도 별 관계가 없다. 종이와 타자기가 전부다. 그래요, 데리다 선생님. 여기, 아마도 제가 궁극의 해체주의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요. 실로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단어들, 단지 단어들.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자들. 당신은 그냥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게 전부다. 문자에 이어지는 문자, 단어에 이어지는 단어. 어떤 단어일 수도 있고, 다른 단어일 수도 있다-별 차이는 없다. 그저 타이핑일 뿐. 문학은, 친구여, 저기 바깥의, 현실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네, 현실 세계 같은 게 있다면 말이지만. 있는 건 전부, 타이핑이다. 단어들, 단어들을 타이핑하는 것.”

 

“나와 같다면, 그녀는 계속 할 것이다. 지금, 나처럼. 타자기에 꽂힌 빈 종이를 보고있노라면,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지며, 타이핑을 해야 하기에, 나는 자리에 앉아 타이핑을 하고, 타이핑을 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아무 목표도 없이, 내 글쓰기가, 내 타이핑이, 가능하다면, 허무에 가까울 만큼 공허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냥 타이핑을 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비-창의적이기를. 나는 창의성을 혐오한다. 창의성은 인생이란 예술에서, 아마도 내가 첫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다. 영화, 특히 영화에서. 그리고 음식, 그래, 음식에서도. 그 모든 창의적인 요리들, 특히 뉴에이지 사람들이 만든 음식들, 나는 그것들을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가 단순한, 옛날식의 햄버거를 먹고, 핫도그를 먹는다. 창의적인 것을 하는 사람들을 뭔가 혼내줄 방법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 발달의 적, 자연 발달의 적이다. 자 자 자,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친애하는 오스카여, 원하는 대로 생각하시길, 당신 생각에는 쥐뿔도 관심 없으니까.”

 

“소설이 점점 더 자전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라고. 요점은, 그것이 나를 계속 타이핑하게 한다는 거다. 당신이 읽든 말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타이핑이고, 올림피아 딜럭스와 나의 관계, 내 손가락들, 이 글자들, 너무 짧아서 5분마다 바꿔줘야 하는 이 리본-이것이 전부다. 친구들이여, 더는 없다네. 문학이랑은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러 가야 한다. 내일, 친애하는 나의 올림피아 딜럭스여, 너에게로 돌아오리.”

 

내게 이 책은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대한 책이었다. 육체적인 행위로서의 글쓰기, 유물론적 글쓰기. 그런 글쓰기에 대한 책. 단문으로 쓰기, 철저하게 퇴고하기, 다 쓰고나서 소리내서 읽어보기, 논거를 잘 채집해서 튼튼한 주장을 담은 글 쓰기, 창의적으로 쓰기, 말하는 것처럼 쓰기 뭐 등등 어쩌고 저쩌고, 이런 글쓰기 책 말고 글쓰기라는 행위를 감각하게 하는 글쓰기. 펜을 쥐고 종이 위에 단어들을 한 자 한 자 새기는 글쓰기, 출퇴근길에 아이폰 메모앱으로, 쓰지 않으면 못 견뎌서 쓰는 글쓰기, 뭐라도 써야 살겠어서 쓰는 글쓰기, 기계식 키보드와 모니터 앞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그 글쓰기, 그 감각에서 희열을 느끼는 글쓰기. 읽는 내내 뭐라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그게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